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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케티, 그리 새롭지는 않지만…

입력
2014.05.19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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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본주의형 인간은 아닌 듯싶다. ‘능력만큼 벌어야 한다’는 데 동의는 하지만 지금의 소득 격차가 합리적인 수준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연봉 수십 억원을 받는 대기업이나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들의 능력과 공헌도가 밤낮으로 일하는 중소기업 직원의 50배, 100배나 되는지는 솔직히 의문이다.

뛰어난 CEO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들이 그 자리에 가기까지 단지 능력만이 고려됐을 거라고도 생각지 않는다. 세상에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어디 한둘이겠는가. 운도 따랐을 거고, 연줄을 잡았을 수도 있다. 여기에는 요즘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 관피아(관료 집단)의 힘이 작용한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전문경영인들은 인정해줄 부분이 있다. 어찌됐든 그들은 어느 정도 검증을 거쳐 치열한 경쟁을 뚫고 그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래서 평범한 직장인들도 꿈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일조하는 것도 사실이다. 더구나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천문학적인 연봉을 챙겨간 월가 CEO들의 천박한 탐욕에는 비할 바가 아니다.

정말 받아들이기 힘든 건 그 어느 나라보다 탄탄한 우리나라 부(富)의 세습 구조다. 돈이 돈을 낳고, 또 그것이 2세, 3세, 심지어 4세들에게까지 고스란히 대물림된다. ‘부자 3대 못 간다’는 옛 속담은 무색해진 지 오래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부자들의 재테크는 땅 짚고 헤엄치기나 다름 없었다. 단지 은행에만 돈을 넣어두어도 복리로 붙은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집이나 땅을 사두면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심지어 은행 예금금리가 연 20%를 넘나들며 원금이 2배로 불어나는데 4년이면 족했던 시절도 있었고, 부동산을 사면 몇 년도 안 가 가격이 서너 배 폭등하던 때도 있었다. 사업으로 망하거나 도박으로 돈을 날리는 경우가 아닌 한, 한번 부가 축적되기만 하면 좀처럼 부자 반열에서 미끄러질 일이 없다. 이런 부는 편법과 불법 사이의 교묘한 줄타기를 통해 대대손손 물려져 왔다. 요즘 부자들이 “돈 굴릴 곳이 없다”고 아우성치는 것이 이런 부의 증식과 대물림이 차질을 빚을 수 있다는 불안감 때문일 테다. 지금과 같은 저금리가, 또 부동산 침체기가 없었으니까.

이런 한국 땅에서 살고 있는 우리에게 요즘 미국과 유럽 대륙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론(Capital of the 21st Century)‘은 솔직히 별반 새롭지 않다. 아직 국내에 한글 번역본이 출간되지 않았지만, 강연 요약본 등을 보면 그의 주장은 꽤 단순하다. 빈익빈 부익부는 자본주의의 본성이다. 아주 예외적인 시기를 제외하면 자본 수익률이 경제 성장률을 웃돈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 아래에선 돈이 돈을 버는 속도가 일해서 버는 속도를 늘 앞지른다. 그래서 피케티는 지금 세계가 상속 엘리트들이 물려받은 부에 의해 세상을 지배하는 ‘세습 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로 회귀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오래 전부터 느끼고 체감해온 것들의 되풀이다.

그래도 피케티가 1700년 이후 300년에 걸친 경제 통계로 이런 사실을 실증적으로 입증했다는 건 적지 않은 의미가 있어 보인다. 기득권층이 반박 논리로 늘 주장해 왔던 낙수효과(trickle down effectㆍ부자들의 소득 증가는 소비 증가 등으로 넘쳐 흘러 저소득층의 소득 증가로 이어진다는 것)는 지금껏 실증적으로 입증된 적이 없었으니까.

아마도 한글 번역본이 국내에 소개되는 가을쯤에는 우리나라에도 피케티 열풍이 몰아치지 않을까 싶다. 피케티가 제시하는 최고 80%의 소득세나 글로벌 부유세 같은 극단적인 처방까지 기대할 수는 없더라도, 이명박 정부 초기처럼 낙수효과를 들먹이며 부자 감세 등을 몰아치는 이들에 대한 저항의 논거는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물론 세습 자본주의의 중심에 있는 그들이 순순히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고, 그래서 피케티 열풍도 오래 지속되지 못할 거라는 우려가 더 앞서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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