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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영정 끌어안고 청와대앞 밤샘... KBS사장 그제야 달려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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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영정 끌어안고 청와대앞 밤샘... KBS사장 그제야 달려와

입력
2014.05.1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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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9일 오후 청와대 입구에 위치한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9일 오후 청와대 입구에 위치한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주민센터 앞에서 박근혜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고 있다. <뉴시스>

9일 오전 3시 50분 어머니는 서울 종로구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 사거리 차가운 아스팔트에 주저 앉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의 영정에 먼지라도 앉을세라 흰 장갑을 낀 손으로 연신 훔쳐냈다. 영정 위로 어머니의 눈물이 또 흘렀다. 한숨처럼 깊은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가만히 있었던 우리가 무슨 죄가 있다고….” 영정 70여위를 든 가족들은 청와대를 300여m 앞둔 거리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공영방송에 분노한 가족들 청와대로

경기 안산시 정부 합동분향소를 지키던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을 분노의 행진에 나서게 한 것은 김시곤 KBS 보도국장의 발언이었다. 김 국장이 사내 회식에서 ‘세월호 사고는 300명이 한꺼번에 죽어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 수를 생각하면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는 보도가 나와 파문이 일자 KBS는 전날 사과의 뜻을 전하기 위해 보도본부장 등을 분향소로 보냈다. 그러나 정작 김 국장은 오지 않았고, 실랑이 과정에서 보도본부장 일행은 유족들에게 붙들린 취재주간만 남겨둔 채 사라졌다.

유가족 150여명은 바로 서울 여의도 KBS 본관을 찾아 길환영 사장 면담과 김 국장의 해임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통령에게 이야기하자”며 다시 길을 나섰다. 청와대로 향하는 길은 경찰들이 막아 섰다. 영정을 든 한 여성은 경찰에게 “수학여행 갔던 네 동생들이야”라고 외치며 울먹였다. 숨진 단원고 학생 아버지 김모(44)씨는 “보도국장이 제 새끼가 그런 상황이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 사정 몰랐다” 대답에 탄식

이날 날이 밝자 단원고 희생자 실종자 가족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의 김형기 부위원장, 류경근 대변인, 황필규 법률대리인, 전해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 대표단이 박근혜 대통령 면담 요청을 위해 청와대에 들어갔다. 오전 11시쯤 대표단은 중간 브리핑에서 “사고 초기 미흡했던 현장 조치 등을 설명했다. 청와대 정무수석과 홍보수석이 ‘그런 사정이 있는 줄 몰랐다’고 대답했다”고 전하자 곳곳에서 탄식과 실소가 흘러 나왔다. 한 유가족은 “어떻게 모를 수가 있느냐. 우리가 헛소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아느냐”며 가슴을 쳤다.

생존 학생에 “살아 돌아와 고맙다. 아들아”

단원고 생존 학생 학부모 45명도 이곳을 찾았다. 장동원 생존학생 가족 대표는 “늦게 와서 죄송하다. 유가족들이 청와대로 간다는 소식을 들은 아이들이 ‘엄마 아빠는 왜 청와대에 안 가느냐’고 했다”며 고개를 숙였다. 한쪽에서는 “우리 애가 전선을 붙잡고 탈출했다는데, 뭐라고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는 생존 학생의 어머니와 자식의 영정을 꼭 끌어안은 어머니가 함께 통곡했다.

휴대폰과 연결된 스피커를 통해 생존 학생 대표가 “다 같이 오지 못해 송구합니다. 저희도 친구를 잃어 너무나 슬프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부모들은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쏟았다. “살아줘서 고맙다”라는 외침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새벽부터 이어진 시민들의 정

유가족들의 청와대 항의 방문 소식을 듣고 새벽 길을 달려온 시민들은 돗자리, 담요를 나눠주고 따뜻한 음료를 날랐다. 한켠에서는 대학생들이 노란색 종이배 수백 개를 접어 경찰버스에 붙였다. 종이배에는 ‘내 아들 정현아 조금만 기다려봐 너의 억울함을 풀어줄 거야’ ‘길을 열어라’ 등의 문구가 적혔다. 15개월 된 아들을 유모차에 태우고 나온 이미경(38)씨는 “영정을 들고 있는 부모님들을 보니 눈물이 난다”며 “유모차를 보면 유가족들이 아이들 생각이 더 날까 봐 멀리 떨어져 함께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민들에 감사”…다시 안산으로

오후 3시 30분쯤 길환영 KBS 사장이 유가족 앞에서 “보도국장의 부적절한 발언으로 깊은 상처를 드린 부분, 사죄 말씀 드린다. 앞으로 유가족과 국민의 마음을 헤아리고 위로하는 방송을 하겠다”고 말했다. 김병권 대책위원장은 “우리는 시위하러 나온 것이 아니고 우리의 상황을 청와대에 전달하고 KBS 사장의 사과를 받기 위해 온 것”이라며 분노가 가시지 않은 유가족들을 설득했다.

대통령 면담은커녕 철저한 실종자 수색, 세월호 사고 진상조사 추진 등 요구에 대한 제대로 된 답변조차 듣지 못했지만 유가족들은 “주민들과 시민사회에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오후 4시 안산으로 돌아갔다. 시민들은 눈물과 박수로 유가족들을 배웅했다.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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