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기동에 있는 작은 전시공간을 찾았다. 희고 깨끗한 벽에 작품을 설치하는 일반적인 미술관과 달리, 낡은 건물의 침침하고 얼룩덜룩한 내부를 그대로 활용하는 곳이었다. 내가 안으로 들어선 건 오후 3시 무렵이었을 것이다. 커다란 통유리창 너머로 건물과 벽돌담 사이의 좁은 뒤란이 눈에 들어왔다. 지난해의 낙엽들이 수북이 쌓인 바닥 위로 새로 돋은 풀 두어 포기가 자라고 있었다. 담벼락에 바로 가로막혀 있건만 어둑한 실내와 대비되는 환한 공간이었다. 가벼운 바람에 풀잎들이 살랑거렸고, 유리 위에는 한 줄기의 쨍한 햇살이 사선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앞에 멍하니 한참을 서 있었다. 햇빛이 그리는 저 선분의 기울기는 얼마일까. 선분. 기울기.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거의 써본 적 없는 이런 수학 단어가 떠오른 건 한 소녀의 목소리가 뇌리에 남아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에 잠기는 배 안에서 삶의 마지막 순간을 동영상으로 기록하며 소녀가 읊조린 혼잣말. ‘배가 되게 많이 기울었다…근데 기울기는 어떻게 계산했지?…’ 무섭고 절박한 아침을 이토록 차분하고 아름다운 유머로 견디려 했던 그 아이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다만 여기, 기울기가 있다. 해는 움직이고, 기울기는 조금씩 변하고, 유리를 두른 검은 창틀은 액자처럼 보인다. 떠난 아이들의 마음을 담은 영정사진 같다. 아니, 그 아이들이 남긴 작품이 벽에 걸려있는 것만 같다. ‘기울기’라는 제목의 작품이.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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