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 몇 년 전의 일이다. 시간에 촉박하게 집을 나선 탓에 정거장의 버스를 보고 전력질주로 올라탔는데, 버스가 출발한 다음에야 지갑을 두고 온 걸 알았다.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가방을 뒤져도 버스비만큼의 동전이 나오지 않았다. 비굴한 어조로 운전기사에게 사정을 말했다. 대답이 없었다. 내릴까요, 하고 설마하며 물었더니, 그는 정말 다음 정거장에서 앞문을 열고 고갯짓으로 하차를 재촉했다. 쫓겨나듯 내렸다. 하필 간격이 너무 뜬 정거장이었다. 인적조차 드물었다. 약속이고 뭐고 이미 물 건너 간데다 운전기사에 대한 원망도 겹쳐 울컥 울음이 터졌다. 그때 일이 떠오른 건 며칠 전 또 지갑을 두고 나와 하루를 보낸 후였다. 이번엔 다행히 주머니에 후불교통카드가 있었다. 그래도 꽤 불편한 날이 되겠거니 짐작했는데, 웬 걸, 동전 한 푼 없이도 거뜬했다.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고도 분식집에서 김밥 한 줄을 먹고도 카드를 내밀었다. 친구를 만나 맥주를 마신 후 ‘오늘은 내가 살게!’ 할 수 있었던 것도 물론이다. 달랑 카드 한 장이면 안 되는 게 없단 말이지. 약간의 취기 때문인지 마음이 가벼웠다. 두툼한 지갑이 없으니 가방도 가벼웠다. 하지만 이 가벼움은 또한 뭔가를 잃은 허전함 같기도 했다. 편리함의 대가로 나는 카드의 네트워크 속에 무엇을 흘리고 다닌 걸까. 그 뭔가가 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채로, 버스에서 쫓기듯 내렸던 오래 전의 하루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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