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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더 나은 미래를 만든다

입력
2014.05.1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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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지 말아 주세요.” 지난 9일 안산의 고교생들이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또래 친구들을 추모하는 침묵 행진에 들고 나선 노란 종이팻말 속 글귀다. 말 없이 걷는 아이들의 소리 없는 외침에 심장이 저려왔다. 배가 기울어 물 속에 가라앉는 장면을 TV 생중계로 뻔히 지켜보면서도, 어처구니없는 ‘단원고생 전원 구조’ 속보에 홀려 듣지 못했던 희생자들의 마지막 절규가 겹쳐 들려왔다. 아이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이 참극을 빚어낸 어른들이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비통해 하지만, 이 참혹한 슬픔과 분노가 서서히 잦아들고 나면 거짓말처럼 예전 그대로인 일상에 젖어 들지 모른다는 것을.

“반드시 승리해서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내겠습니다.” 지난 10일 새누리당의 중진 의원이 경기지사 후보로 선출된 뒤 던진 일성이다. 속을 훤히 드러낸 당당한 외침에 가슴이 턱 막혀왔다. 한 강연에서 “우리나라는 큰 사건만 나면 대통령과 정부를 공격한다”며 국민성을 나무랐다는 국가보훈처장까지, 이제는 놀랍지도 않은 정부ㆍ여권 고위 인사들의 망언 퍼레이드가 겹쳐 떠올랐다. 그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표심을 얻기 위해 지금은 죄인인 양 머리를 조아리고 있지만, 이 참극에 대한 정부 책임의 정점에 선 대통령을 위해 호위병 노릇을 자처하지 않는다면 제 잇속을 지켜내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나흘 뒤면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꼭 한 달이다. 그 사이 무엇이 달라졌나. 사고 초반 제 발로 배 밖으로 나와 목숨을 건진 이들 외에 당국의 적극적인 구조 작업을 통해 살린 생명은 그대로 ‘0’이다. 아직 20여명의 귀한 생명이 바다에 갇혀 있다. 선장 등 선원들이 줄줄이 구속되고 청해진해운의 실소유주 유병언 일가에 대한 전방위 수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왜 아이들을 살리지 못했는가”라는 유가족들의 피맺힌 물음에는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사고의 근인(根因)까지 낱낱이 밝혀 책임을 묻고 더는 이런 참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나라 전체의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데 온 힘을 쏟아도 모자랄 때에, 제 잇속 차리기에 바쁘다 못해 국민의 정당한 분노와 비판에까지 색깔을 입혀 ‘정치 선동’으로 몰아가는 행태까지 벌어지고 있다. 낯 부끄러운 일이다.

대통령의 안이한 사태 인식도 걱정스럽기는 매한가지다. 박 대통령은 지난 9일 청와대에서 긴급 민생대책회의를 주재하며 “사회 불안이나 분열을 야기시키는 일은 국민경제에 도움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세월호 참사가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한 말이라지만, 별 근거도 없이 ‘불안’과 ‘분열’을 언급함으로써 지난 4일 진도 팽목항을 찾아 “사고 발생부터 수습까지 무한한 책임을 느낀다”고 했던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했다. 더구나 당시는 KBS 보도국장의 부적절한 발언에 분노한 유가족들이 전날 밤부터 청와대 앞 도로에서 아이들 영정을 부여안고 대통령 면담을 요구하고 있던 때였다.

지금 이 정부의 꼴은 침몰한 세월호를 꼭 닮았다. 실권 없는 ‘시한부 총리’에다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거나 나타나도 우왕좌왕만 되풀이하는 장관들, 유불리 따지기에 바쁜 정치인들, 낡디 낡은 색깔론을 들이대며 ‘가만히 있으라’고 다그치는 그 주변의 인사들…. 그러니 국민들이 분노를 멈출 수 없고, 멈춰서도 안 되는 것이다.

지난해 작고한 프랑스의 사회운동가 스테판 에셀은 분노하라(2011) 한국어판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분노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하지 않는 사람이라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습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투명사회(2014)에서 분노를 일시적 감정인 격분과 구분 지어 “기존의 상태를 중단하고 새로운 상태를 시작하게 하는 능력”이라고 했고, “그렇게 해서 분노는 미래를 만들어 낸다”고 썼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해 지금은 분노할 때다. 그러기에 ‘이 나라 못 믿겠다’고 뇌까리며 내 새끼, 내 가족의 안전만 챙기고 마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나서 낡고 병든 것을 바꾸자며 안산의 거리를, 서울의 광장을 메우는 분노의 물결에서 희망을 본다. “잊지 말아 주세요”라는 아이들의 간절한 호소를 결코 잊지 않겠다고 답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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