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프랑스 남부 휴양도시 칸의 날씨는 자애롭다. 햇볕은 따스하고 바람은 온화하다. 그늘에 있으면 살랑이는 바람에 솜털이 살짝 일어서나 햇볕을 받으면 금세 몸이 데워진다. 오렌지 향을 품은 듯한 햇빛이 파도 사이로 부서진다. 하늘거리는 야자수 나무가 지중해의 한가로움을 전한다. 시선 닿는 곳마다 청량감이 눈으로 밀려온다.
영화천국 칸의 번화가는 라 크로와제다. 칸영화제의 행사장으로 쓰이는 건물 팔레 드 페스티발에서 동쪽으로 해변을 따라 이어진 약 1㎞ 길이 거리에 사람들이 붐빈다. 칸국제영화제 기간 동안 라 크로와제는 영화의 거리다. 각국을 대표하는 감독과 유명 배우들이 이 길을 통해 영화제 레드 카펫을 밟으며 위세와 자태를 뽐낸다. 영화제 개막 이후 첫 주말 라 크로와제는 절정에 달한다. 사람들을 헤치고 걷기조차 힘들다. 지난 17일과 18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거리는 샤넬 넘버5 향수를 몇 리터는 뿌린 듯 달콤하나 인공적인 향취가 넘실거렸다. 한껏 멋을 낸 성장한 남녀가 거리를 메우며 축제를 즐겼다.
라 크로와제는 명품의 거리다. 루이비통과 샤넬과 에르메스 등 세계의 명품이 각 건물 일층을 장식하고 있다. 명품 가게 사이사이엔 고급 호텔들이 서있다. 칸영화제 기간 라 크로와제 호텔 객실 요금은 상상 이상이다. 하루 숙박비가 보통 1,000유로(150만원)다. 국내 유명 배우들도 영화제가 부담하는 숙박(보통 2박3일이나 3박4일)을 제외하며 허름한 숙박시설에서 머무는 경우가 많다.
명품 가게와 고급 호텔이 즐비한 라 크로와제는 칸영화제를 대변한다. 제품 선정에 유난히 까다롭고 보통 고객은 상대하지 않는 듯한 태도가 서로 닮았다.
칸영화제는 관객 친화적인 영화제는 아니다. 대중을 위한 영화제라기보다는 ‘관계자’들을 위한 영화제라 할 수 있다. 칸영화제는 여느 영화제와 달리 티켓을 따로 팔지 않는다. 부산국제영화제 등 국내 유명 영화제들이 개막작 티켓이 몇 초 만에 팔렸다는 점을 알리며 영화제의 성공을 홍보하나 칸은 그럴 수 없다. 출입증에 해당하는 배지를 소유한 기자와 영화인들에게만 우호적이다. ‘초대장’ 형식의 티켓이 있으면 대중들도 영화를 볼 수 있으나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그러니 제아무리 영화광이라 해도 영화를 보겠다고 칸영화제 기간 칸을 찾진 마라 비싼 숙박비가 지갑을 거덜 낼 뿐이다). 요컨대 칸은 대중들에게 불친절한 영화다.
기자의 배지 보고 "티켓 좀 구해달라"
너무 비싼 영화제, 그래서 더욱 참여하고 싶은 욕구 자극
‘까칠한’ 영화제인데 대중들은 칸영화제에 목을 맨다. 유명 배우들처럼 근사하게 차려 입고 레드 카펫을 걸으며 극장 안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티켓을 구하기 위해 팔레 드 페스티발 앞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큰 종이에 적어 들고 있는 대중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영화를 보기 위해 몇 시간이고 서있는데 헛수고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칸영화제 티켓 구하기는 말 그대로 하늘에서 별 따기이다. 기자의 배지를 보고선 칸 시민들이나 관광객들이 다가와 “영화제 티켓 좀 구해달라”고 말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기자나 영화관계자라 해도 티켓 구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가지고 싶지만 너무 비싸서, 그래서 더 소유하고 싶은 명품처럼 칸영화제는 대중들의 참여(구매) 욕망을 강하게 자극한다.
칸영화제의 영화를 고르는 과정은 명품 제조와 닮았다. 아무나 칸의 문턱을 넘을 수 없다. 이미 영화 역사가 된 거장들이 주로 칸영화제 경쟁부문 초대장을 받는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12번째로 경쟁부문을 찾은 켄 로치 감독, 칸영화제 대상인 황금종려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장 뤽 다르덴, 피에르 다르덴 형제 감독 등 세계적 명장들이 치열한 경쟁을 펼치고 있다. 역대 최연소로 경쟁부문에 진출한 자비에 돌란(25) 같은 신진 감독도 있으나 이들도 일정한 과정을 거쳐 경쟁부문에 입성했다. 돌란은 칸영화제의 외곽 행사인 감독주간에 첫 소개된 뒤 ‘마이너 경쟁부문’이라 할 주목할만한 시선을 거쳐 올해 경쟁부문에 올랐다. 칸영화제는 계층화된 각 부문을 통해 자신들의 감독을 육성하고 관리한 뒤 까다롭게 초청작들을 골라낸다.
"검은 운동화? 들어올 자격 없어요"
엄격한 드레스 코드… 팬들은 '기립박수'로 고급예술 대우
경쟁부문 작품을 공식 상영하는 갈라 스크리닝에서도 칸영화제의 고급화 전략이 돋보인다. 갈라 스크리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배우이든 감독이든 저명인사이든 아니면 평범한 시민이든 옷을 갖춰 입어야 한다. 남자는 검은 턱시도나 정장을 입고 보타이를 매야 하고 여자는 드레스로 몸을 감싸야 한다. 취재를 핑계로 예외로 취급되길 원하는 기자들도 드레스 코드를 피할 수 없다. 몇 년 전 국내 일간지의 한 기자는 검은 운동화를 신고 갈라 스크리닝에 참가하려다 진행 요원의 완강한 제지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레드 카펫 주변에서 카메라를 들고 취재경쟁을 펼치는 세계 각국의 사진 기자들은 무거운 장비와 더불어 검은 정장과 하얀 드레스 셔츠, 보타이를 빼놓지 않는다(이런 엄격한 드레스 코드는 경쟁부문 상영에 주로 적용된다).
정장과 드레스로 무장한 관객들은 영화가 끝나면 기립박수를 보낸다. 한국영화가 경쟁부문 공식 상영에서 몇 분 동안 기립박수를 받았다는 소식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다. 갈라 스크리닝의 기립박수는 영화를 향한 일종의 예의이고 칸영화제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가장 대중적인 매체인 영화는 칸영화제에서 그렇게 고급스러운 예술 대우를 받는다.
칸영화제를 제외한 세계 유명 영화제는 드레스 코드를 그리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는다. 베를린국제영화제와 베니스국제영화제, 토론토국제영화제는 드레스 코드의 엄수를 요하는 상영회가 많지 않다. 이들 영화제는 대중들에게 그리 인색하지도 않다. 평범한 사람들이 돈을 주고 티켓을 구해 영화를 볼 수 있는 ‘보통 영화제’들이다. 칸영화제만 유난을 떤다고도 할 수 있다. 한데 이런 유난스러움이 역설적으로 칸영화제를 명품으로 만든다. 다른 유명 영화제들이 메스티지(대중적으로 소비되는 고급제품)라면 칸영화제는 프레스티지라 할 수 있다.
칸영화제는 영화를 탄생시킨 나라 프랑스의 자존심을 드러난다. 영화라는 판타지를 자극하면서도 영화의 예술적 의미와 사회적 의무를 강조한다. 공정소비를 강조하는 명품 회사를 닮았다고 할까. 칸영화제의 명품 전략은 아무나 쉬 따라 할 수 없겠으나 참조할 점은 많고도 많다.
칸=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후기: 몇 년 전 국내 한 유명 배우가 칸국제영화제의 초청을 받았다. 그는 영화제가 제공한 고급 호텔에서 며칠을 묵었으나 나머지 기간은 그리 좋지 않은 호텔에서 머물러야 했다. 코디네이터 등 ‘수행원’이 많아 국내 영화사가 고급 호텔 숙박비를 대줄 수도 없었다. 영화제 기간 어느 날 백팩을 매고 수행원과 함께 이름 모를 호텔로 향하는 그를 본적이 있다. 야속하게도 그를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한국인조차!)은 아무도 없었다. 세계의 스타들이 출동하는 영화제이니 그라고 뭐 별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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