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칸은 '설국열차'다

입력
2014.05.18 14:20
0 0
칸국제영화제를 찾은 기자들이 영화 상영을 앞두고 뙤약볕 아래에서 줄을 서 있다. 화제작의 경우 2시간 넘게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높은 등급의 배지를 지닌 기자들은 상영 시작 10분을 남기고 극장에 도착해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맨위 사진). 영화 상영 때마다 기자들을 ‘계급’에 따라 입장시키기 위해 안내판이 극장 앞에 세워진다(가운데 두 사진). 뤼미에르 대극장으로 통하는 레드카펫.
칸국제영화제를 찾은 기자들이 영화 상영을 앞두고 뙤약볕 아래에서 줄을 서 있다. 화제작의 경우 2시간 넘게 기다리는 경우도 있다. 물론 높은 등급의 배지를 지닌 기자들은 상영 시작 10분을 남기고 극장에 도착해서도 영화를 볼 수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맨위 사진). 영화 상영 때마다 기자들을 ‘계급’에 따라 입장시키기 위해 안내판이 극장 앞에 세워진다(가운데 두 사진). 뤼미에르 대극장으로 통하는 레드카펫.

칸국제영화제는 영화제 중의 영화제다. 올해 제67회를 맞이한 이 영화제는 세계 예술영화의 최전선에 서있다. 올해로 칸영화제를 7번째 찾은 한국일보 영화담당 라제기 기자가 칸영화제의 속을 깊이 들여다본다.<편집자주>

“난 화이트 배지야!” 제67회 칸국제영화제가 3일째를 맞은 16일 오후(현지시간)였다. 영화제 행사 건물 앞에 각국의 기자들이 100m 길이의 줄을 만들어놓고 있었다. 터키 감독 누리 빌제 세일란 감독의 ‘윈터 슬립’을 보기 위해서였다. 칸영화제 이등상에 해당하는 심사위원대상을 두 차례, 감독상을 한 차례 각각 받은 감독의 신작이니 기자들의 관심이 쏠렸다. 영화 상영 시작 시간이 15분 밖에 남지 않았는데 줄이 줄어들지 않자 기자들은 당황한 표정이었다. 덩치 큰 한 남성이 줄을 헤집으며 진행 요원에게 큰 소리를 쳤다. “하얀 배지인데 나 먼저 입장해도 되지 않아?” 부당하게 들릴 사내의 주장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칸영화제는 계급사회다. 노골적으로 구별하고 은연 중에 차별한다. 영화를 보는 눈과 사운드를 듣는 귀는 공평할지 몰라도 영화를 보기 전과 영화를 상영하기 전까진 영화제를 찾은 모든 이들에게 차이가 존재한다.

해외 취재진만 4,000명

매체의 역사, 발행부수 등에 따라 배지 색깔로 기자 등급 구분

적어도 기자들에게 칸영화제는 명백한 계급사회다. 칸영화제에 참가하는 기자들은 각기 다른 배지를 받는다. 배지는 ‘화이트’와 ‘로즈’ ‘블루’ ‘옐로우’ 네 가지로 크게 나뉜다. 배지는 각 색깔로 구별되고 일종의 계급장 역할을 한다. 화이트 배지를 지닌 기자가 계급의 가장 윗자리를 차지한다. 기자 시사회 등 모든 행사에 입장할 때 최우선 대우를 받는다. 화이트 배지가 어느 정도 행사장에 들어가면 로즈 배지가 이어서 자리를 채운다. 블루와 옐로우 배지가 뒤이어 입장한다. 심지어 배지 별로 서는 줄도 다르다.

블루와 옐로우 배지가 뙤약볕 아래에서 또는 비를 맞으며 오랜 시간 시사회 입장을 기다리는 반면 화이트와 로즈 배지는 대부분의 경우 곧바로 입장한다. 기자들이 많이 몰리는 화제작을 상영할 때나 대형 스타가 참여하는 기자회견이 열릴 경우 블루와 옐로우 배지를 지닌 기자들은 찬밥 신세다. 한 시간 넘게 기다리다가도 영화를 못 보거나 기자회견 취재를 못 할 수 있다. 블루와 옐로우 배지는 취재 과정의 불편함을 넘어서 취재에서 배제까지 당할 수 있다.

기자들의 계급을 나누는 이유는 간단하다. 칸영화제의 명성에 맞게 너무 많은 기자들이 취재를 위해 달려들기 때문이다. 칸영화제 발표에 따르면 해외에서만 4,000명의 언론인이 칸으로 몰린다. 한정된 공간과 제한된 시간을 감안했을 때 모두에게 공평한 취재 기회를 줄 수 없다. 각종 보도자료와 파티 초대장들이 전달되는 프레스 박스도 1,800명 가량에게만 주어진다. 기자들은 우편함 같이 생긴 프레스 박스를 통해 그날그날의 소식과 정보를 얻는다. 프레스 박스를 배정 받지 못한 기자들은 남들이 보고 버린 자료들을 쓰레기통에서 뒤져 취재 계획을 세운다. 올해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커다란 재활용 쓰레기통에 갖은 자료를 버리는 기자들 옆에서 낮은 계급의 기자들이 쓰레기통 자료를 뒤적였다.

기자들의 계급을 나누는 기준은 있다. 소속 매체의 역사와 발매부수(또는 시청자), 영화 산업에 대한 전문성, 영화제 보도량 등을 고려해 계급장이 각기 주어진다. 역사가 오래되고 독자나 시청자가 많은 언론사에서 전문성을 지니고 영화제를 많이 보도할수록 상위 계급에 배정된다.

경쟁부문, 주목할만한 시선, 비경쟁부문, 미드나잇 상영 순으로 영화 등급 차별

각 부문별 상영회수에 따라 또 다시 등급 차별

기자들에게 분명한 계급이 주어진다면 영화나 감독은 은근하게 계급이 나뉜다. 영화들을 초청하는 부문부터 계급성을 내포하고 있다. 칸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 등을 다투는 경쟁부문이 영화제의 꽃으로 꼽힌다. ‘마이너 경쟁부문’이라 할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이 경쟁부문의 뒤를 따르고 비경쟁부문, 미드나잇 상영 부문 순으로 등급이 나누어진다. 신인 감독이 단번에 경쟁부문에 진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비경쟁부문 등에 초청돼 가능성을 인정 받은 뒤 훗날 경쟁부문 진출을 모색하게 된다.

경쟁부문 안에서도 차별은 존재한다. 경쟁부문에 진출한 모든 영화는 칸영화제의 심장인 뤼미에르 대극장에서 상영된다. 뤼미에르 대극장은 미국의 저명한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가 “세상에서 가장 영화보기 좋은 극장”으로 손꼽은 곳이다. 경쟁부문 진출작들은 상영 회수에 따라 구분된다. 사람들의 관심이 많이 쏠린 영화일수록, 감독의 지명도가 높거나 출연 배우의 인기가 많을수록 상영도 잦다. 올해 경쟁부문 진출작들의 뤼미에르 대극장 상영 회수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할리우드 노장 배우 토미 리 존스의 감독 데뷔작 ‘홈즈맨’은 세 차례 상영이 배정된 반면 일본 감독 가와세 나오미의 ‘스틸 더 워터’는 단 1회만 상영된다.

주목할만한 시선 부문 영화들은 영화제 상영극장 중 규모가 두 번째인 드뷔시 극장에서 상영된다. 할리우드 스타 라이언 고슬링의 감독 데뷔작 ‘로스트 리버’는 2회 상영되나 정주리 감독의 첫 장편영화 ‘도희야’는 1회만 관객들과 만난다.

감독, 배우도 '급'에 따라 숙소 배정

심사위원된 전도연은 처음으로 최고급 호텔 배정

숙소에도 차이가 있다. 경쟁부문 초청 감독이나 배우도 ‘급’에 따라 숙소 대우가 달라진다. 칸에서 가장 등급이 높은 호텔로 마제스틱 호텔이 꼽힌다. 국내 한 영화제의 관계자는 “칸영화제 측은 가장 중요한 초청 인사에게 마제스틱 호텔의 방을 제공하고 급이 좀 낮은 영화인은 그 다음 단계 호텔로 잠자리를 준다”고 말했다. 올해 칸영화제 심사위원이 된 전도연은 처음으로 마제스틱 호텔에서 영화제 기간 내내 머문다. 전도연은 2007년 ‘밀양’으로 최우수여자배우상을 받았고 2010년 ‘하녀’로 경쟁부문을 찾았었다.

상영 회수가 적거나 상대적으로 덜 평가 받는 부문에 초청된 감독은 조금이라도 자존심이 상할 만도 하다. 초청 받은 부문은 같은데 등급이 다른 호텔을 제공 받으면 기분이 좋을 감독과 배우도 없다. 하지만 감독들은 영화제 쪽에 서운한 감정을 갖기보다 자극을 받는 것 같다. 다음에 칸을 찾을 때는 좀 더 나은 부문에서 좀 더 자주 자신의 영화가 상영되길 감독들은 대개 원한다. 은연 중에 좀 더 중요한 인사로 대접 받기를 기약한다. 거부하기 힘든 인간의 본성이다. 세계 최고의 영화제가 세우는 줄이니 대놓고 불만을 표시할 수도 없다. 칸은 시기와 질투와 경쟁 심리를 은근히 조장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고 과시한다. 칸이 아무리 계급사회여도 세계 영화인들이 고개를 숙이는 건 어쩔 수 없다. 칸은 칸이니까.

*후기 : 한국일보 기자는 로즈 배지를 받았다. 취재에는 큰 불편함이 없으나 가끔 대형 이벤트에선 '선착순'에 밀리기도 한다. 국내 종합 일간지 기자는 대부분 로즈 배지를 받는다. 그러나 몇몇 언론은 블루 배지나 옐로우 배지를 받는다.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