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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배 안으로 돌아간 당신... 반딧불이 같은 희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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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몰하는 배 안으로 돌아간 당신... 반딧불이 같은 희망입니다

입력
2014.05.18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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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을 부인에게 남기고 배 안으로 들어갔다가 숨진 양대홍 세월호 사무장의 영결식이 18일 인천 길병원에서 거행되고 있다. 그를 잊어서는 안될 세월호 의인이라며 의사자로 선정해야 한다는 글이 온라인에서 이어지고 있다. 인천=연합뉴스
"아이들을 구하러 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을 부인에게 남기고 배 안으로 들어갔다가 숨진 양대홍 세월호 사무장의 영결식이 18일 인천 길병원에서 거행되고 있다. 그를 잊어서는 안될 세월호 의인이라며 의사자로 선정해야 한다는 글이 온라인에서 이어지고 있다. 인천=연합뉴스
시인 장석주
시인 장석주

인천을 떠나 제주도로 가던 세월호가 물길 사납다는 진도 앞바다에서 뒤집혀 가라앉았다. 구명조끼를 입고 구조를 기다리던 284명이 싸늘한 사체로 인양되고 아직도 20명은 생사가 불명인 채 실종 상태다. 차가운 바다에 삼켜져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희생자 대부분은 수학여행에 나선 한 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건만 우리 마음은 여전히 분노와 슬픔으로 끓고 있다. 일상의 조촐한 보람이던 산책도 시들하고, 다투어 피어나던 모란과 작약, 가까운 언덕과 먼 산의 신록조차도 생뚱맞아 보이고, 평소라면 혀에 녹는 듯 맛났을 음식도 쓰디썼다. 우리는 한 달 동안 실의와 무력감, 우울증과 허탈에 빠져 일손을 놓고 허송세월을 하며 재난이 만든 트라우마를 집단적으로 앓는 중이다. 이 무고한 어린 생명들을 죽음의 바다로 밀어 넣은 자는 누구인가?

승객들을 버려두고 허겁지겁 달아나기에 바빴던 뻔뻔한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 과적과 탈법의 주체인 해운회사, 해운회사의 실소유주라는 이와 그 일가의 기괴한 탐욕과 비리 목록들, 구조 매뉴얼도 없이 우왕좌왕 한 해경, 컨트롤 타워 부재를 드러낸 부실한 정부가 합작해서 뭇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기본과 원칙이 무너진 자리에 비리와 탈법이 독버섯처럼 자라고, 도덕과 이성을 대신해서 탐욕과 이기주의가 활개를 쳤지만 우리는 묵인하고 방조했다. 이 참사로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나고, 낮은 자리로 추락한 대한민국의 초라한 국격(國格)이 폭로되었다. 대통령이 머리를 조아리고 거듭 사과를 하고, 정부가 국가안전처를 신설하겠다고 약속하지만, 그것으로 찢긴 마음이 아물지는 않는다. 300여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참사는 부패 사회와 부실 국가가 합작으로 저지른 타살이고, 이 살인에 우리 모두는 유죄다! 부패의 고리 속에서 잇속을 챙기기에 바빴던 이 사회의 뻔뻔한 개체들과 집단들을 용납하고, 그것들에 빌붙어 비루한 밥을 먹고 편안한 잠을 잔 우리 모두는 죄인들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 사실 우리 사회 전반에 비명횡사와 참사의 가능성은 예측할 수 있는 일이었다. 위기 징후들이 불거졌지만 부패와 복지부동에 빠진 관료 조직, 무능하기 짝이 없는 정부 권력, 돈을 신으로 섬기며 도덕적 해이에 빠진 사회, 탐욕과 이기주의로 뭉친 몰이성적인 기업과 타락한 기업가들, 당리당략에 매인 정치집단들 모두가 그 사실을 외면했다. 1년 전 동물원과 유토피아라는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책을 내면서 한국 사회가 “눈 뜬 장님들”처럼 파멸을 가져오는 “다가오는 ‘빙산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음을 경고한 바 있다. “한국인들이 승선한 ‘한국호’는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바다를 항해한다. 미래는 불확실한데, 그것은 우리 삶이 예측불가능한 위험들 속에 있다는 반증이다. 그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들이 우리의 삶을 집어삼킬지도 모른다.”(124쪽)라고 썼다.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나는 한국 사회를 우리가 망가져서 맹수들이 탈출한 동물원에 빗대면서 이 “동물원은 관리 권력이 전혀 미치지 못하는 무법과 탈법, 혼란과 무질서가 판을 치는 정글”(300쪽)이라고 썼다. 살육과 아수라장이 펼쳐지는 우리가 망가진 ‘동물원 사회’에서는 내부의 자율적이고 내재적인 윤리와 도덕이 자본과 이윤의 탐욕으로 대체”되고, “사회적 약자들은 ‘벌거벗은 생명’으로 내쫓기고”(297쪽) 있음을 경고했다. 하지만 이 경고에 아무런 메아리가 없었다.

우리는 생산과 효율성을 좇으며 더 많은 이익과 성과를 내는 ‘성과주체’가 되도록 강요하는 사회 시스템에 포획당한 채 만성적 위기 불감증에 빠져 우물쭈물 대다가, 세월호 침몰이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이 참사에 마치 먹잇감을 놓고 달려든 하이에나 같이 ‘과잉 상태’에 빠진 미디어들에서 절망했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모든 프로그램이 퇴출되고, 종일 참사 뉴스만으로 채워졌다. 이 참사가 중요한 뉴스임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매체들이 속보 경쟁에 뛰어들며 똑같은 뉴스를 되풀이하는 데서 나는 도무지 절제와 균형감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미디어들이 끝도 없이 쏟아내는 말들에는 실종자 가족의 슬픔과 상처에 대한 배려도 없었고, 희생자들에 대한 차분한 애도도 없었다. 지각의 쇄신 없이 무의미한 말들만 동어반복하는 매체들에서 나는 몰이성적 획일주의, 들뜲, 진정(鎭靜)과 고요에 이르려는 노력을 무력하게 만드는 광기를 보았다.

우리는 어떤 강박들에 사로잡혀 조금씩 미쳐 있는 게 아닐까? 돈을 쫓고, 즉물적이고 감각적인 쾌락으로만 치닫는 사회에서 도덕적 기강의 후퇴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돈벼락을 맞는 ‘대박’이 ‘꿈’으로 포장되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권력을 쥔 이들이 호의호식하는 이 ‘미친’ 사회에 재난과 불행은 불가피한 것이다. 모두가 ‘성과기계’라는 괴물들로 퇴행해버린 현실 속에서 우리는 비판과 통찰력을 키워주는 인문학을 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경시했다. 자기 성찰로 이끌고 마비된 양심을 깨우고 벼리는 책을 읽기보다는 취업에 유리한 스펙 쌓는 것을 더 중요시했다. 다들 ‘몸짱’ 만드는 일에는 열심이었지만 ‘지적 근육’을 만드는 일에는 한없이 게을렀다. 이 천박한 실용주의가 득세하는 사회에서 주체적으로 사유하고 고요 속에서 자아를 돌아보는 계기와 능력을 갖추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세월호 참사는 오늘 이성과 양심이 마비되어 작동하기를 멈춘 개체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맞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파탄이 구체적인 현실로 불쑥 드러난 재난이다.

단테는 신곡에서 지옥을 그려냈는데, 그 ‘지옥’의 입구에는 “이 문으로 들어오는 자여, 모든 희망을 버릴진저.”라고 씌어 있다. 단테는 희망이 없는 곳, 한 점의 희망마저 품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지옥이라는 것을 말한다. 몇 백만명의 유대인을 가스실로 보낸 나치의 아우슈비츠와 같은 강제 수용소들이 그렇고, 200만명이 살해되고 300만명의 난민을 낳은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에 장악된 캄보디아가 그렇고, 일본군의 만행으로 몇 십만명이 무참하게 죽음을 맞은 중국 난징이 그렇고, 군부 독재자의 명령으로 계엄군에 의해 시민 학살이 저질러진 1980년 광주가 그렇다. 그때 그곳에는 아무 희망도 없고 오직 살육의 광기만이 반뜩였으니, 바로 지옥이었다. 모두가 돈에 미쳐 물신주의로 치닫고, 어디 한 군데 멀쩡한 곳이 없이 부패한 이 나라, 땅 위에서 땅 속에서 바다에서 하늘에서 잇달아 무고한 인명이 죽어나가는 참사가 터지는 지금 여기가 지옥이 아니라고, 감히 부정하지 못한다. 우리에게 한 점의 희망이라도 남아 있는가?

배가 침몰하고 다들 제 목숨을 구하는 일에 급급할 때 구명보트를 양보하거나 타인을 구하려고 가라앉는 배 안으로 들어간 의인들이 있었다. 이웃을 위해 자기 목숨을 바친 이들의 한없이 아름답고 숭고한 행동에서 나는 여름 밤 공중에서 반짝이는 반딧불이 같이 잔존하는 희망의 근거들을 본다. 세상은 슬픔으로 얼룩져 있고, 만사는 거대한 시름 덩어리지만 의인들의 놀라운 용기와 희생이 마치 등불을 켠 듯 마음을 환하게 만든다. 이제 그만 슬픔을 딛고 일어나자. 다들 일상으로 복귀해서 슬픔을 연민과 사랑의 에너지로, 분노를 사회 개조의 동력으로 만드는데 힘을 모으자. 희생자들에 대해 충분히 애도하고, 이 참사 원인을 조목조목 따지고 책임을 질 사람들에게는 엄중하게 그 책임을 묻자. 이런 재난이 재발하지 않도록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일에 머리를 맞대자. 더 좋은 날이 올 것이란 희망을 포기하지 말자. 아직 우리에게 일말의 희망은 있다. 그런 희망을 키우고 그 희망을 이웃과 나누자. 이 희망을 끝끝내 놓지 않을 때, 우리에게 더 좋은 날들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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