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양국의 농구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고(故)이상백 박사다. 그는 한국 농구뿐만 아니라 일본 농구에서도 선구자 역할을 했다. 약관 20대의 나이로 1929년 일본농구협회를 창설해 상무이사를 시작으로 일본체육회 전무이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조선의 아들이 일본 체육회를 쥐락펴락한 것이다. 그는 광복 후 한국의 국제올림픽위원회(IOC)가입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런 공로로 1964년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겸 IOC위원을 지내는 등 체육 행정가로 혁혁한 공헌을 했다.
그의 사망 후 한일 양국은 이상백이 씨앗을 뿌린 농구분야에서 손을 맞잡았다. 그의 이름을 딴 대학선발 농구대회를 1978년부터 매년 개최해 오고 있다. 유망주 발굴과 함께 양국 대학생들의 친목 도모에 목적을 뒀다. 물론 젊은 패기가 맞붙는 만큼 승부욕은 빠질 수 없다.
한국 남자농구를 주름잡은 스타들은 예외 없이 이상백배의 ‘부름’을 받았다. 이충희(55), 고 김현준(54), 허재(49), 문경은(43), 서장훈(40), 현주엽(39) 등이 대표적이다. 국내 최고의 현역 슈터 조성민(31ㆍ부산 KT) 또한 한양대 시절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다.
조성민은 “대회 취지를 경기 전날 대한농구협회 측에서 알려줘 잘 알고 있었다”며 “승패보다는 교류전 성격이 짙었다. 그래서 나중에 국제대회에서 일본선수들과 다시 만날 때 반갑게 인사할 수 있는 계기가 된 대회”라고 당시 상황을 떠올렸다. 이어 “그래도 대학 선발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뛰니까 자부심도 생기고, 국제 대회 경험을 쌓는 이점 또한 있었다”고 덧붙였다.
올해로 37회째를 맞은 이상백배 한ㆍ일 대학선발농구대회가 16일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화정체육관에서 열렸다. 방열(73) 대한농구협회장은 대회 개회식에서 “고 이상백 박사의 뜻을 기리며 한일 농구는 70년대 후반부터 대학농구를 통해 많은 발전을 이뤘다”며 “꼭 이겨야 한다는 치열한 승부보다는 돈독한 우정과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고, 페어플레이 정신을 바탕으로 경기력 향상의 기회가 되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에바 테츠오 전(全)일본 대학농구연맹 회장도 “해를 거듭할수록 이상백 박사를 기리는 것을 넘어 한일 대학생들의 친선의 정이 깊어졌다”면서 “양국의 대학 선수들이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축사를 했다.
이날 1차전에서는 한국 대학선발팀(감독 황준삼)이 83-66으로 일본 선발팀에 완승을 거뒀다. 리바운드 싸움에서 54-37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해 손쉽게 이겼다. 정효근(한양대)이 16점, 김준일(연세대)이 13점을 기록하는 등 선수들 전원이 고른 득점을 올렸다. 2, 3차전은 각각 같은 장소에서 17일 오후 3시, 18일 오후 1시에 열린다. 한국은 지난해까지 통산 전적 80승27패로 일본을 압도했다.
김지섭기자 onion@hk.co.kr
이상백은 누구
이상백(1903~66) 박사는 한국사회학의 개척자이자 체육계 선구자다. 1903년 8월 대구에서 태어난 이 박사는 1920년 3월 대구고등보통학교(현 경북고)를 졸업한 뒤 일본 와세다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와세다대 농구팀 주장은 물론 감독까지 맡았다. 1929년에는 일본농구협회 창설을 주도했고, 상무이사로 일하며 일본 농구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1931년 일본체육회 상무이사, 1935년 일본체육회 전무이사를 역임하고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는 일본 대표단 총무로서 손기정 등 조선인 7명을 일본 올림픽 대표팀에 합류시키는데 막후 역할을 하기도 했다. 1945년 광복후에는 경성대(현 서울대) 교수, 대한체육회부회장,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