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절대 잊지 말아야 할 ‘통로’

입력
2014.05.15 13:59
0 0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고 있는 쉬린 네샤트의 전시는 울렁이는 소리와 강렬한 이미지들로 가득하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그녀의 작품을 직접 볼 수 있었던 것은 ‘인+간’을 주제로 한 2000년 광주 비엔날레를 통해서였다. ‘이야기의 중심인 남성과 그들을 바라보는 여성’이라는 분절된 두 개의 영상이 노골적으로 대치하면서 적절하게 시적인 긴장을 유도하는 무제(환희 시리즈)는 당시 많은 주목을 받았다. 젠더와 페미니즘의 문제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여성의 입장에서 작가의 이야기에 공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제3세계의 독특한 지역색을 드러내며 정치적으로도 올바른, 그렇기 때문에 전략적으로도 해석되고 쉽게 비판할 수 없다는 점에서 영리한 선택일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작품의 수와 규모에서 회고전에 가까운 이번 전시에서는 연일 드러나는 세월호 참사를 둘러싼 답답하고 믿기 힘든 소식들이 쌓여 울컥한 심정으로 전시장을 배회하게 되었다. 개인과 역사를 넘나드는 첨예한 주제들을 떠나서 그녀가 가진 정서적인 장점에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준 작품 중 하나가 통로(Passage, 2001)이다. 편안한 몰입을 방해하고 비판적인 거리를 확보하게 만드는 장치인 영상의 분리도 없고, 흑백의 대조도 없는 단채널 영상이지만 세 개의 장면들이 각각 독립적으로 진행되다가 서서히 통합된다. 흰 천에 싸인 누군가의 시체를 메고 바닷가를 걷는 남성의 무리와 손으로 리듬을 맞춰 흙을 파는 여성들, 그들의 대열처럼 동그랗게 조그만 돌무더기를 쌓는 소녀는 영상의 말미에 한 화면으로 모이고 삼각형의 불길이 그들을 연결한다. 전시장의 설명에는 여기에 등장하는 물과 불의 이미지가 이란에서 시작된 고대 조로아스터교의 정화적인 요소를 암시한다고 쓰여 있다.

가족의 죽음을 접한 뒤 구상하게 되었다는 통로는 미국의 작곡가면서 비서구권 음악의 영향을 받은 필립 글래스의 협업으로 완성되었다. 특유의 반복적이고 미니멀한 사운드와 함께 검은 덩어리가 되어 원형으로 둘러앉은 여성들이 맨손으로 마른 흙을 파내는 장면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요새나 성곽과 같은 닫힌 공간과 대비되는 벌판과 숲, 강과 해안 등 해방을 상징하는 광활한 대자연은 작가의 영상 여러 곳에 등장하는데 통로에서는 거대한 애도의 공간이 되고 등장인물들의 움직임과 사운드가 고조될수록 깊숙한 곳에서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친다. 진도의 팽목항에서 이제 한 달이 다되도록 자식을 돌려받지 못하고 남겨진 어머니들의 편지처럼.

작가가 태어나고 성장했던 당시의 이란은 지금과 달랐다. 팔레비 시대가 끝나고 극단적인 보수 정권인 호메이니가 집권하게 되면서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급격하게 여성에 대한 탄압의 수위가 높아졌다고 한다. 아랍 하면 쉽게 연상되는 검은 차도르의 착용이 의무화된 것도 1981년에 이르러서이다.

쉬린 네샤트는 17세에 미국으로 유학 간 후 12년 만에 돌아온 고국의 모습에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온전히 서구화되지도 못하고 더 이상 이란의 문화에도 일체감을 느낄 수 없는 그녀는 근대화와 세계화의 격랑 속에서 퇴행을 거듭한 이란의 현실을 고발한 자신의 작품 때문에 성공한 작가가 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망명자의 신분이다. 언젠가 70년대까지만 해도 자유로웠다는 아랍권 국가의 여성들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환하게 웃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진들을 본 적이 있다. 이슬람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권력 앞에 인간으로서의 자유와 존엄은 그렇게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이제 우리에게 또 한번의 선거가 다가온다. 사실 매번 선거를 통해서 무엇이 바뀔 수 있을까 더 회의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란의 교조적인 정권이 개개인의 삶을 초토화시킨 것은 결코 먼 곳의 이야기가 아니다. 세월호의 참담한 침몰을 계기로 한 사람의 자리가 해낼 수 있는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하는 기회들도 있었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성의껏 선거에 임할 것이지만 이것이 할 수 있는 애도의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정민 미술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