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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의 주역 장칭(江靑)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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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혁명의 주역 장칭(江靑) 자살

입력
2014.05.12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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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이 주일의 小史]

제136회 -5월 둘째 주

마오쩌뚱의 네 번째 부인이자 문화혁명의 주역 장칭이 1981년 공개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들어가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마오쩌뚱의 네 번째 부인이자 문화혁명의 주역 장칭이 1981년 공개 재판을 받기 위해 법정에 들어가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

“마오 주석, 당신을 사랑합니다. 제자이자 전우였던 제가 이제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중국 현대사에 있어 누구보다 극적인 삶을 살았던 마오쩌둥의 네 번째 부인 장칭이 1991년 5월 14일 베이징 교외의 한 병원에서 손수건으로 목을 매 자살했다. 80년 사형판결을 받고 감형돼 무기수생활을 이어온 지 11년만이었다.

교도소를 나와 연금돼있던 그의 가택 책상에는 인민일보에 휘갈긴 짤막한 유서와 함께‘마오쩌둥 선집’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1914년 산둥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장칭은 15세 때 상하이로 이주해 여배우로 성장했고, 36년 마오가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대장정을 마무리하자 본명이었던 리칭윈(李靑雲)을 버리고 장칭이라는 이름으로 공산당에 합류했다. 24살 여배우였던 그는 당원교육장에서 바람둥이 중국지도자와 만나 사랑에 빠졌고, 당은 두 가지 원칙을 내걸고 이들의 결혼을 허락했다. 첫째는 ‘여자는 최선을 다해 마오를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앞으로 30년간 여자는 그 어떠한 정치활동을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었다. 마오의 네 번째, 장칭의 세 번째 결혼은 21살의 나이차를 두고 그렇게 성사됐다.

루신 예술학원 교수를 지내며 조용한 내조를 이어가던 장칭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중국 최초의 여성황제 ‘측천무후’를 꿈꾸게 된 계기는 1960년대 중국현대사를 뒤흔들었던 문화대혁명이었다. .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과도한 중공업 정책으로 국민경제가 몰락하자 마오는 사회주의 계급투쟁을 명분으로 반대파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1966년부터 76년까지 10년에 이른 극좌 사회주의 운동인 문화혁명은 학생들로 조직된 홍위병을 앞세워 중국대륙을 광기로 물들였다. 수정론자였던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숙청됐고, 마오의 부인 장칭과 왕훙원, 장춘차오, 야오원위안 등 이른바 문혁 4인방이 정치 전면에 나섰다.

인민복을 몸에 두르고 정치에 뛰어든 장칭은 문화혁명 절정기 당시 톈안먼광장에서 150만 홍위병을 사열하며 위세를 떨쳤지만, 1976년 마오가 사망하자 상황은 돌변했다. 기대와 달리 마오로부터 권력을 이어받은 화궈펑이 덩샤오핑과 손을 잡고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권력의 뒤끝은 허무했다. 장칭을 비롯한 4인방은 반혁명주범으로 체포돼 재판에 넘겨졌고 1981년 ‘인민의 적’이라는 죄로 사형선고가 내려졌다.

재판정에서 그는 한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사형이 선고되자 “나는 마오의 개였다. 그가 물라 하면 물었다”고 외치며 법정에 드러누워 울부짖었다.

권력의 상실은 모든 것을 잃는 것이었을까. 1983년 종신형으로 감형된 장칭은 인후암에 걸려 교도소 밖 생활을 하던 중 91년 5월 14일 새벽 아무도 없는 가운데 쓸쓸히 생을 마감했고 화장된 유골은 딸에게 전해졌다.

4인방 멤버였던 왕훙원도 이듬해 세상을 떴고 2005년, 장춘차오와 야오원위안도 병으로 사망해 중국 문화혁명의 주역들은 사라지고 상처만 남았다.

손용석기자 stone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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