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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대한 책임감만이 '제2 세월호'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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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에 대한 책임감만이 '제2 세월호' 막을 수 있다

입력
2014.05.11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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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비루하고, 인간은 치사하고, 인간은 던적스럽다. 이것이 인간의 당면문제다. 시급한 현안문제다.”라고 소설가 김훈은 공무도하에서 썼다. 지난 4월 16일,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 400명이 넘는 승객을 남겨둔 채, 팬티 바람으로 조타실을 빠져 나와 해경에게 구조되는 선장을 TV 화면으로 지켜보는데, 그 문장이 떠올랐다. 분명, 그 순간 선장은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 비루함과 치사함과 던적스러움을 향해 어떤 조롱의 말도 던질 수 없었다. 대신에 내 눈에는 가라앉는 배만 보였다. 거기 배가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숨이 막혀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올해로 나는 45세가 됐다. 세월호의 3층과 4층 객실에 앉아서 구조되기만을 기다리던 아이들만할 때만 해도 이런 나이가 내게도 찾아올 줄은 전혀 몰랐다. 내가 그 나이였을 때는 1987년으로, 그 해에는 유난히 충격적인 죽음들이 많았다. 서울대생 박종철씨는 물고문을 받다가, 연세대생 이한열씨는 시위에 나섰다가 최루탄을 맞고 숨졌다. 11월에는 대한항공 858편이 인도양 상공에서 폭파되면서 탑승객과 승무원 115명이 전원 사망했다. 아, 여름에는 용인의 한 공장에서 35명이 자살하는 괴사건도 발생했다. 바로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고등학교 2학년이라면, 그런 사건들이 아니라 일년 내내 교실에 앉아서 공부만 하던 무채색의 기억을 배경으로 그 해 가을 수학여행지였던 설악산 여관촌 마당에서 빨갛게 타오르던 캠프파이어 불꽃이 먼저 떠오른다. 그때 우린 기껏해야 열일곱 살이 아니면 열여덟 살이었고, 지금 누군가는 죽어간다거나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몰라도 괜찮았다. 저마다의 꿈에만 몰두해도 좋은 시절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들 알다시피, 그런 시절은 곧 지나가고 아이는 성인이 된다. 성장한다는 건 알을 깨고 나오는 새와 같은 것이라고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이제 그 새는 타인의 세계를 향해 날아갈 것이다. 그렇게 관계는 형성되고 우리는 책임이라는 단어의 뜻을 배운다.

대학에 들어간 나는 수강신청을 하기도 전에 타인의 고통을 외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부터 먼저 배웠다. 당시의 선배들은 유별났다. 입학하자마자 잘못 배운 게 많다며 스터디를 시작할 정도였으니. 도대체 우리가 뭘 잘못 배웠느냐고 물으면, 곧바로 “전부 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때로 그런 확신이 거슬리기도 했지만, 그때 한국 사회가 오랜 미몽 속에서 깨어나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 미몽이란 사회적 약자들의 고통에 대한 집단적 무지, 혹은 망각의 상태를 뜻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뿌리가 깊어 한국인들에게는 일종의 처세술에 가까웠다. 예컨대 “모난 돌이 정 맞는다”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 등의 속담으로 압축되는. 그런 처세술을 소설화하면 채만식의 태평천하가 나오리라.

1937년을 배경으로 주인공 윤직원은 지주이자 고리대금업과 부동산 투기를 통해 부를 쌓은 부자다. 그에게는 괴로운 기억이 하나 있으니, 바로 아버지의 죽음이다. 구한말 고을 수령과 화적떼에 시달리던 아버지 윤용규는 화적떼의 요구에 돈을 내놓지 않고 버티다 죽고 말았다. 이에 윤직원은 피에 물들어 참혹히 죽어 넘어진 아버지의 시체를 안고 땅을 치면서 “이놈의 세상이 어느 날에 망하려느냐!”라고, 또 “오냐, 우리만 빼놓고 어서 망해라!”라고 소리친다. 이 소설에 따르면, 윤직원의 처세술이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악착같이 돈을 모아서 ‘우리만’ 잘 사는 일이다.

대학시절, 아버지 세대까지 면면이 이어온 이 처세술을 자발적으로 거부하는 학생들을 많이 봤다. 자신들이 꿈꾸는 새로운 세상에 가 닿으려면 타인의 고통과 연대해야만 하는데, 그러자면 이 처세술을 뛰어넘어야 했던 것이다. 그들은 고난을 자처했는데, 그건 태평천하 식으로 말하자면 “아버지의 삶을 반복하지 않겠다!”라는 선언적 행동과 같았다. 나는 그게 우리 세대의 선언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제는 안다. 우리 이전의 모든 젊은 세대들이 그렇게 선언했고, 또 거의 대부분 실패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 사실을 이렇게까지 뼈저리게 확인할 줄이야. 그로부터 채 3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우리 눈 앞에서 배가 가라앉았다. 우리가 꿈꾼 새로운 세상 역시 그 배와 함께 가라앉았다. 가장 뼈 아픈 것은 거기에 우리의 아이 세대가 타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완벽한 실패다. 이 실패 앞에서 신속한 위로를 원해서는 안 된다. 전문가들의 분석으로, 하룻밤의 토론으로, 신문의 특집기사로 단숨에 사건의 전말을 이해하려는 욕망을 포기해야만 한다. 미심쩍은 부분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까지는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게 낫다. 만약 이것이 적폐의 소산이라면, 기꺼이 이 적폐를 마주하되 요령부득의 문장을 읽을 때처럼 꼼꼼히 따져봐야만 한다. 아주 작은 진실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면 가장 어두운 무지의 상태도 마다하지 말아야만 한다. 완벽한 실패에서 빠져 나오는 통로는 완벽한 절망뿐이다.

이 완벽한 절망 속에서 우리는 자문해야 한다. 우리는 왜 실패한 것일까. 무엇이 우리를 비루하고 치사하고 던적스럽게 만들었을까. 지금 우리의 당면문제이자, 시급한 현안문제는 과연 무엇일까. 지난 대선에서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은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던 그 순간, 어쩌면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암시를 준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이 현실은 우리가 예전의 삶을 반복한 결과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지탱한 기본 원리에서 우리가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니, 이 반복은 스스로 적폐가 되는 반복이다. 적폐는 적폐를 청산할 수 있을까. 국가는 국가를 개조할 수 있을까. 책임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 속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이 오랜 적폐의 원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1987년의 대학생들도, 채만식도, 연암 박지원도 알고 있었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집단적 무지, 혹은 망각을 기반으로 축적된 부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부의 축적을 위해 한국 사회는 사회적 원인에서 비롯한 고통이라 할지라도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시켜 관리한다. 물 속 아이를 구해달라고 호소하는 부모들에게 미개하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들을 ‘순수한 유가족’이라고 일컫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여기에 딜레마가 있다. 이들의 고통이 개인적 차원에 머무는 한, 지금까지의 관행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다. 적폐는 적폐를 청산할 수 없고 국가는 국가를 개조할 수 없다. 오직 타인의 고통을 향한 연대에서 나온 책임감만이 이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0년대 중반, 그러니까 30대를 지나는 동안, 우리 세대는 경제적 행복을 가장 큰 가치로 삼기 시작했다. 그건 이제 가족을 이끌게 된 세대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타인의 고통에 무지하거나 망각하는 방식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우리의 실패는 예정돼 있었다. 어떤 풍요인가라는 질문 없이 경제적 풍요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에 우리 세대는 이 끔찍한 실패 앞에서도 사회적 약자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은 사회 불안과 분열을 야기해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하는 정부를 투표로 뽑은 것이다. 이런 세상이라면 다시 20년이 지나 평형수를 줄이고 더 많은 화물을 적재한 위태로운 여객선을 계약직 선장이 운행한다고 해도, 그래서 20년 전의 서해훼리호와 마찬가지로 20년 뒤의 또다른 여객선이 우리의 손자들을 태우고 가라앉는다고 해도 이상할 일은 하나도 없다.

결국 이런 사회밖에 못 만들어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아이들은 우리의 실패를 반복하지 말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라앉는 세월호의 모습을 보고 또 보기를, 그리하여 우리처럼 망각하지 말고 어른이 되어서도 꼭 기억하기를. 그 배에 어떤 사람들이 타고 있었으며, 그들은 어떻게, 그리고 왜 죽어야만 했는지. 세월호라는 이름이 잔인하게만 들리는 건, 오래 전부터 사람들은 가족을 잃은 이들에게 세월이 약이라거나 세월이 가면, 모든 게 잊힌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월은 가지 마라. 아직은 잊을 때가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약이 아니라 진실이다. 그 진실을 모두 알아낼 때까지 대한민국의 시간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이 수학여행지인 제주도에 도착하기만을 기다리던 2014년 4월 16일 아침에 멈춰있어야만 한다. 가라앉는 그 배는 이제 우리가 지킬 테니, 봄꽃처럼 짧은 생을 살다 가버린 아이들은 부디 우리를 용서하지도 말고, 이 땅에 미련을 두지도 말고, 좋은 곳으로 떠나길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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