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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옛 전설의 준엄한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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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옛 전설의 준엄한 상징

입력
2014.05.09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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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뷔시의 ‘가라앉은 대성당’은 브르타뉴의 지방의 오랜 전설을 모티브로 작곡된 작품입니다. 바다보다 낮은 지면 위에 제방만 높이 둘러 건설된 도시 이스(Ys)는 한 여인의 충동으로 수몰되어 버리고 맙니다.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세월호 참사와 소름 끼치도록 유사한 상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드뷔시는 대담한 상상력으로 이 전설을 다시 음악의 힘을 통해 불러 일으킵니다.

곡의 시작은 멀리서 바라본 바다의 잔잔한 수면을 5음 음계로 묘사하며 출발합니다. 가운데 음을 빼버린 화성의 나열은 공허하면서도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냅니다. 한동안 물 밖에서 관조하던 멜로디는 투명한 옥타브 선율을 통해 드디어 물속으로 진입합니다. 아직은 얕은 수심, 물속을 관통한 햇볕 덕택에 시야가 밝습니다. 이때 낮은 음역에서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합니다. 음형은 깊은 수심에서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는데, 얼어붙은 화음이 이 물결을 쨍그랑거리며 방해합니다. 피아니스트 미셸 베로프는 이 느닷없는 화음의 삽입을 잠수부의 시선에 비치기 시작한 바닷속 대성당의 모습이라 설명하더군요. 대체 어떤 사연으로 이 성당은 물속 깊이 수몰되었을까요.

옛 브르타뉴 지방에 바다를 유달리 사랑했던 공주가 살았습니다. 딸을 애지중지 아끼던 왕은 바다에 가장 가깝게 지은 이스 성을 공주에게 선사합니다. 높은 제방이 둘러싸고 있지만 도시가 발딛은 지면은 해수면보다 낮습니다. 왕은 제방의 열쇠를 항상 목에 걸고 다닙니다. 그러던 어느 날, 붉은 옷을 입은 기사가 이스를 찾아와 공주를 유혹합니다. 공주는 그와 사랑을 나누고 싶어 합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제방에 부딪히는 거대한 파도 소리가 그들의 단꿈을 방해합니다. 공주는 남자를 안심시키려 말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 성의 수문은 튼튼하고 제방의 열쇠는 오직 아버지만 갖고 계세요.” 남자는 대답합니다. “아버지가 잠들었을 때, 당신이라면 열쇠를 쉽게 가져올 수 있겠군.” 남자는 사실, 기사의 모습으로 둔갑한 악마였습니다.

얼어붙은 화음의 파편을 통해 수심 깊은 곳으로부터 설핏 감지되던 대성당의 정체는 드디어 포르티시모(ff)의 강력한 화음과 함께 그 거대한 위용을 드러냅니다. 어떤 문헌에는 이 장면을 수몰된 성당에 쩌렁쩌렁 울려 퍼지는 파이프 오르간의 음색이라 설명하고 있습니다. 짙은 공명의 육중한 화음은 다시 중후한 선율로 가라앉습니다. 그레고리안 성가의 진행을 닮은 이 중성적 선율은 성당과 함께 수장된 수도사의 찬송을 연상케 합니다. 이때 음역과 선율의 방향이 바뀌며 여인의 구슬픈 음성이 등장합니다.

사랑에 눈이 먼 공주는 아버지의 목에 걸린 열쇠를 몰래 훔쳐 악마에게 바칩니다.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악마는 제방의 수문을 모조리 열어버립니다. 거대한 파도가 이스를 순식간에 삼켜 버리던 찰나, 왕과 공주는 가까스로 마법의 말에 올라탑니다. 하지만 말은 몸을 뒤틀어 공주를 폭풍우 속 바다에 내던집니다. 전설은 바다에 빠져 익사한 공주를 인어의 눈물로 기록합니다.

피아니시모로 시작되는 가냘픈 선율은 인어의 노래를 연상케 합니다. 인어의 음성은 서서히 북받쳐 오르며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는 듯한 회한을 전해줍니다. 구슬픈 노래는 곧 대성당의 주제와 오버랩 됩니다. 아까와 똑같은 선율인데도 이전엔 강력한 위용으로 청자를 압도했다면, 이번에는 멀리 물러나 사라지는 잔향으로 공명을 비워냅니다. 잦아든 선율은 다시 5음 음계의 잔잔한 수면으로 돌아와 곡을 끝맺습니다.

전설은 이야기를 마무리하며 지상의 도시가 악행으로 멸망할 때 수몰된 이스가 물 위로 떠오른다 경고하고 있습니다. 제방이라는 위험한 기술에 의존해 하나의 열쇠로 통제하다 인간의 오판으로 물에 잠긴 이스의 전설은 현재 대한민국이 호되게 앓고 있는 세월호의 참사와 여러 면에서 공통점을 갖습니다. 곧 바다 위로 떠오르게 될 세월호는 물 위로 떠오르는 이스와 다르지 않습니다. 이 사회의 오래된 악행을 준엄히 경고하고 있는 것이지요.

조은아 피아니스트,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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