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 보면 너는 참 예술가 스타일이야.” 친구가 내게 말을 했다. 체제 순응적이지 않고 자유분방하며, 따박따박 할 말 다하고, 감정 기복이 크기 때문이라고 했다. 곱씹어보니 성격 안 좋다고 공격한 것 같다…. 예술가에 대한 통념에서 비롯된 ‘디스(diss)’를 당해봤기 때문일까. 스토리 온(Story on)에서 방영되고 있는 예술과 예술가에 대한 리얼리티 프로그램 아트 스타 코리아(이하 ‘아스코’)를 흥미롭게 보고 있다.
아스코는 주제에 대해 각기 다른 접근을 보여주는 출연자들의 작품과 이에 대한 설명, 작품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첨언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예술에 대해 느끼고 생각할 수 있도록 돕는다. 1회에서는 서바이벌 시스템에 대한 문제의식을 환기하며 스스로의 탈락을 심사위원들에게 요청하는 작가가 나왔다. 이는 예술과 사회 구조의 관계에 대해 성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탈락을 요청했던 차지량 작가는 페이스북을 통해 계약서의 부당함을 폭로하는 미디어 퍼포먼스를 이어가고 있다). 2회와 3회에서는 “본인의 상처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정면 승부”하고 “아픔에 갇히지 않고 바깥에 끌고 나가”며 “개인의 얘기가 덧붙여져 폭발력이 강해져 깊은 인상을 남기게 하는”, 소통을 중시하는 작품들이 호평을 받았다. 5회에서는 작가들을 두 팀으로 나눠 ‘공공미술’을 진행하게끔 했는데, “관객 경험의 영역을 넓히고 강렬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부분”이 우세한 작품과 강렬한 이미지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주민들의 의견이 직접 반영되고 주민이 직접 참여를 했던 작품이 대립했다. 이는 삶의 터전에서 미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또 무엇을 하는 것이 마땅한지에 대한 화두를 던졌다.
아스코를 보며 예술에 대해 생각하다가, 새삼 한국은 참 ‘예술하기’ 좋은 나라라고 느껴졌다. 여기서 ‘예술을 하기 좋다’는 것은 ‘예술가로 먹고살기 좋다’는 것과는 다른 얘기다. 우리가 예술이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많은 삶의 터전에서 살고 있다는 뜻이다. 시스템에 문제가 많다. 덕분에 작품의 소재로 삼을 수 있는 것들이 널려있다. 작가적 감수성과 문제적 태도를 가지기 쉬운 사회이기도 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국민적인 상처가 주기적으로 생성돼 예술로 승화시키도록 계속 자극을 준다. 그야말로 ‘아트 권하는 코리아’다.
마스크를 쓰고 ‘가만히 있으라’는 피켓을 든 채 거리를 걷는 집회가 있었다. 이 역시 예술로 느껴졌다. 어른들의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들어 희생당한 아이들이 있었다. 집회는 이에 대한 기억을 환기했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얼마나 슬픈 시대인지를 표현했다. 피켓을 들고 거리를 걷는 이들도, 그것을 지켜보는 이들도 처연한 감정으로 공명할 수 있었다. 거리에 나선 것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명인데, 피켓의 구호는 이와 대비됐다. 이런 역설도 ‘예술적’이었다고 생각한다. ‘가만히 있으라’는 피켓을 든 집회인데 오히려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래, 정말 가만히 있어선 안 되겠다. 뭐라도 해야 한다.
결국 예술인가? 공론장의 축소된 시대다. 논리에 인한 설득이 통하지 않고 편 가르기와 증오가 넘친다. 대리인으로 뽑아놓은 사람들이 국민들의 말을 들어 먹으려 하질 않는다. 민주주의는 허상 같다. 이런 세상에서는 논리를 앞세운 ‘설명’보다 정서적 자극을 주는 ‘표현’으로 문제의식을 환기시키는 것이 선행돼야 할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은 세상이 좋아지길 바라는 사람들은 예술을 해야만 하는 시대인 것이다. 민중가수 연영석 씨는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수상하며 “저에게 변함없이 창작의 욕구를 만들어 준 어두운 사회와 억울한 현실에 감사드립니다”라고 수상소감을 전했다. 나도 이 자리를 빌려 소감을 전하려 한다. “어차피 뭘 해도 먹고살기 어려운 한국이니, 세상이 나아지는 데 기여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어차피 예술가 스타일이라는 말도 들었겠다 저도 예술 해야겠습니다. 아트 권하는 코리아에 감사드립니다.”
최서윤 격)월간잉여 발행·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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