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진저 앤 로사’에는 스쳐가지만 의미심장한 장면이 있다. 10대 중반의 소녀 진저가 반핵 운동가와 선술집을 갔을 때다. 반핵 운동가는 선술집에 처음 왔다는 진저의 말을 듣고 반 잔짜리(Half) 맥주를 시켜준다. 몸은 성숙했으나 정신은 아직 여물지 않은 로사의 사회적 존재를 상징하는 모습이다.
‘진저 앤 로사’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한 소녀의 성장담이다. 주인공이 가슴 아픈 사건을 겪으며 정신이 훌쩍 크게 된다는 흔한 이야기 틀을 지녔다. 영화는 1960년대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하면서 특별해진다. 두 소녀의 우정과 그 우정에 금을 놓는 어른 사이에 맺어진 야릇한 삼각관계가 호기심을 만들어낸다.
진저와 로사(앨리스 엔글러트)는 같은 날 같은 병원에서 태어나 함께 자란 친구다. 사춘기를 넘은 둘은 부모의 눈을 피해 일탈을 즐기고 사회문제에도 관심을 갖는다. 무정부주의자로 자유분방하기 이를 데 없는 아버지 롤랜드(알렉산드로 니볼라)를 둔 진저와 일찌감치 아버지가 집을 나간 로사는 거칠게 없다. 이들은 내일이 없는 듯 청춘을 태운다. 때마침 터진 쿠바 미사일 위기는 진저와 로사의 방황을 부추긴다. 진저와 로사는 롤랜드와 종종 어울리는데 로사는 지적이면서도 우수에 젖은 롤랜드에게서 이성을 느낀다.
영화는 핵폭탄이 터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진저가 아버지와 친구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알게 된 뒤 겪게 될 감정의 폭발을 예고하는 장면이다. 핵무기 때문에 언제 결딴날지 모를 세상에 살게 된 사람들의 불안감을 상징하기도 한다.
진저의 아버지 롤랜드는 딸에게 아빠가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 요구한다. 아버지로 불리길 거부하는 롤랜드는 아버지로서의 책임도 방기한다. 그는 “자유롭기 위해 내 삶에 최선을 다했다”는 식으로 매번 주위의 비난을 피해간다. 마치 자유 수호를 위해 핵 보복을 서슴지 않겠다는 미국 정부의 공언처럼 롤랜드의 인생 방침은 공허하기만 하다. 영화는 롤랜드와 쿠바 미사일 위기를 빌어 아버지를 잃은 1960년대 젊은 세대의 아픔을 은유한다.
‘올란도’(1993)로 각광 받은 영국 여성 감독 샐리 포터의 신작이다. 섬세한 연출이 10대 소녀의 범상치 않은 방황을 세묘한다. 마일스 데이비스와 텔로니어스 몽크 등 20세기 전반을 풍미했던 재즈 연주자들의 곡들이 어수선했던 시대의 공기와 인물들의 심리를 전한다. 15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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