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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ef Speaks(슬픔의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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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ef Speaks(슬픔의 얘기)

입력
2014.05.06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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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가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면 옆에 ‘Too beautiful for earth’(땅 위에 남아 있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웠나요)라는 문장이 쓰여 있다고 한다. 너무도 어린 나이에 부모 곁을 떠난 또 다른 아기 옆에는 ‘No footprint too small to leave an imprint on this world.’라고 쓰여진다고 한다. 하늘 나라의 천사가 적어 놓은 것이라고 하나 어린 생명을 잃은 인간의 슬픔을 표현하는 글들이다.

흔히 자식은 돌아가신 부모 앞에서 그저 운다고 하지만 부모는 부패한 죽은 자식을 끓어 안고 운다고 한다. 세상에는 홀아비도 있고 과부도 있고 고아라는 단어도 있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를 무어라 부르는지 그 명칭도 없다고 한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땅에 묻고 배우자가 죽으면 하늘에 묻는데 자식이 죽으면 ‘부모는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Parents live with the pain of loss in their broken heart.)는 말도 있다. 눈물조차 마른 슬픔을 무엇으로 달래겠는가(Tearless grief bleeds inwardly.) 인터넷에 ‘Pray for South Korea’라는 슬픈 메시지가 떠 있는 것을 보면 세계는 어느새 지구촌이 되어 있고 다른 나라의 참사도 더 이상 남의 일이 아닌 듯 하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다가가서 ‘I am so sorry for your loss.’라고 위로하는 것이 죄스럽게 느껴지는 요즈음이다.

미국의 어느 아기 묘비에는 ‘Love you forever, love you for always, as long as I’m living, my baby you’ll be.’라는 문구가 있다고 한다. 프랑스의 사상가 Voltaire의 말처럼 ‘눈물은 슬픔의 언어’(Tears are the silent language of grief.)라고 하지만 ‘말조차 할 수 없는 비통보다 더 큰 슬픔이 없다’(There is no grief like the grief that does not speak.)는 말이 대비되어 떠오른다. Shakespeare는 ‘그 어떤 말로 표현해도 슬픔을 대신할 수 없는(Give sorrow words; the grief that does not speak whispers the o’er-fraught heart and bids it break.) 때가 있고 ‘더 큰 슬픔에는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다’(To weep is to make less the depth of grief.)고 말했다. 이제 ‘이런 시련은 살아 남은 자가 그 이야기를 전하고 알리는 것이 최소한의 도리’(Whoever survives the test, must tell his story, that is his duty.)라는 말이 떠오르는 이 순간 ‘하늘은 세상이 치유할 수 없는 슬픔을 주지 않는다’(Earth has no sorrow that Heaven can’t heal.)는 말을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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