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1762~1836)과 더불어 동시대 조선 최고의 지성으로 쌍벽을 이룬 인물이 있다. 올해로 탄생 250주년을 맞은 풍석 서유구(1764~1845), 조선 최대 실용백과사전 임원경제지의 편찬자다. 임원경제지는 풍석이 36년을 바쳐 113권 54책으로 완성한 필생의 역작이지만, 완역이 안 됐다. 다산에 필적하는 학문적 업적을 남긴 풍석이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이 책이 완역이 안 된 탓이 크다. 2008년에야 비로소 번역 출간이 시작돼 극히 일부가 나와 있다. 풍석은 아직 전모가 드러나지 않은 거인이다. 전문가들은 임원경제지가 완역되면 풍석 르네상스가 일어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임원경제지는 벼슬에서 물러난 사대부가 시골에서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지식을 분야별 16지, 표제어 총 2만 8,000여개, 252만자로 집대성한 거작이다. 조선과 중국, 일본 서적 853종을 참조해 인용하고 항목마다 풍석 자신의 연구와 논평을 붙여서 완성했다. 정확히 번역하려면 이 많은 참고문헌을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때문에 임원경제지 완역은 수백 종의 책을 한꺼번에 번역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곡식농사백과 본리지, 의학백과 인제지, 음식요리백과 정조지, 교양ㆍ취미백과 유예지, 예술문화백과 이운지, 생활경제백과 예규지 등 임원경제지의 16지는 각각 당대 조선과 동아시아 지식의 최전선이다. 예컨대 인제지는 동의보감 이후 200년 간 축적된 의학 지식의 완결판이고 정조지는 한국 전통음식 문헌으로는 최다인 1200여종의 음식을 정리했다. 가히 전통 지식의 총화라는 점에서 채굴을 기다리는 거대한 광맥 같은 책이다. 이처럼 방대하고 체계적인 백과사전을 한 개인이 완성한 예는 동서고금에 찾기 어렵다.
임원경제지가 완역이 안 된 상태에서 서유구 연구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서유구를 주제로 쓴 석ㆍ박사 학위논문은 2002년 이후 나온 4편, 그의 저작을 번역 소개한 책은 5종에 불과하다. 그의 생애를 정리한 전기는 올해 초 실학박물관이 펴낸 평전 서유구가 유일하다. 반면 다산 정약용에 대한 연구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에 다산 전집 여유당전서가 완역 출간된 이래 이를 바탕으로 나온 석ㆍ박사 학위논문 300여편을 비롯해 논문과 책이 2,000편 이상이다.
서유구 탄생 250주년을 맞아 그를 본격적으로 조명하는 학술대회가 ‘민생과 민본의 실천자 서유구와 임원경제지’를 주제로 9일 국립고궁박물관 강당에서 열린다. 임원경제지 완역을 추진 중인 임원경제연구소와 한국고전번역원이 마련한 행사로 서유구의 사상과 학문 세계, 임원경제지의 가치에 관한 논문 6편을 발표하고 토론한다. ‘서유구의 의학론과 신약 개발 및 디지털 인문학의 가능성’(전종욱 한국한의학연구원 연구원), ‘서유구의 건축론과 현대적 활용성’(이강민 건축도시공간연구소 국가한옥센터장), ‘한국음식사에서 임원경제지 정조지의 가치와 의미’(차경희 전주대 교수) 등은 임원경제지가 과거의 죽은 지식이 아니라 오늘날 널리 활용될 수 있는 살아있는 콘텐츠임을 밝힌다.
민생과 민본은 서유구 삶과 학문의 핵심 정신이다. 그는 조선의 농업과 기술 수준이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할 만큼 낙후한 것을 통탄했다. 관료로서 또 학자로서 이를 개선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조선시대 학문은 사서오경 등 경서를 연구하는 경학과 국가 경영에 관한 경세학이 으뜸이었지만 그는 이를 허황된 것으로 보고 ‘흙으로 끓인 국, 종이로 만든 떡’에 비유했다. “저술하는 선비는 오늘날 헛되이 곡식을 축낼 뿐 세상에 보탬이 되지 않는 자의 우두머리”라고 질타했을 정도다.
그는 부와 권력, 교양과 학식을 모두 갖춘 당대 최고의 명문가에서 성장했지만, 당시 사대부들이 잡학이라 낮춰 보던 농업ㆍ기술ㆍ의학 등 실용 학문에 매진했다. 임원경제지를 철저히 ‘실용적인’ 백과사전으로 편찬한 배경이 여기에 있다. 곡식 농사, 가축 기르기, 옷감 짜는 법, 집 짓는 법, 가계부 쓰는 법, 가정 경제와 재산 관리법 등 의식주와 직결된 내용부터 교양과 여가 생활에 이르기까지 임원경제지의 내용은 놀랍도록 구체적이어서 실생활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이 모든 지식은 그가 관직에서 쫓겨나 있던 18년 동안 고향인 경기 파주의 임진강 변에서 직접 농사 짓고 물고기 잡아 생계를 이으면서 체험과 관찰로 확인하고 보강한 것이다. 정조가 가장 총애한 규장각 각신으로 국가의 주요 서적 편찬사업을 주도하는 등 탄탄대로를 달리던 그가 낙향한 것은 43세 때인 1806년(순조 6년) 집안이 사화에 연루돼 몰락해서다. 풍석 자신의 회고에 따르면 끼니를 걱정하고 하루에도 세 번씩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던 그 시절에 임원경제지 편찬에 착수했다. 60세에 다시 관직에 나간 뒤로도 죽기 전까지 다듬어서 완성했다.
서유구 평전을 쓴 염정섭 한림대 사학과 교수는 서유구를 “농학자이면서 서지학자, 농업개혁론자, 관료, 유서(類書ㆍ백과사전) 편찬자, 산문가, 시인 등 다양한 얼굴을 가진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염 교수는 “2000년대 이후 서유구의 삶과 폭 넓은 학문세계에 대해 여러 분야에서 다채로운 접근이 이뤄지고 있지만 그가 지닌 ‘천의 얼굴’을 하나로 모은 형체는 여전히 희미하다”고 지적한다. 학제적이고 융합적인 연구가 필요한 까닭이다.
서유구 연구는 농학, 한문학, 서지학 등에서 부분적으로 이뤄져 왔을 뿐 그의 학문 세계 전체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실학 연구단체 실시학사는 한문학, 역사학, 농학, 철학, 자연과학, 음악, 복식사 등 여러 분야 학자 10명이 참여한 서유구 연구서 2권을 올해와 내년에 나눠서 낸다. 서유구는 그렇게 조금씩 우리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오미환 선임기자 mh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