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놀아난 것일까, 아니면 공조를 한 것일까.
침몰한 ‘세월호’ 운항사 청해진해운의 실 소유주 유병언 전 세모그룹 회장이 약 40년에 걸쳐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고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금융권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했다. 부도가 나기 전에도, 다시 회사를 재건할 때도 금융권은 ‘유병언 왕국’에 거침없이 자금을 지원했다.
유 전 회장은 1972년 무역업체 삼우트레이딩을 인수하면서 사업에 발을 담갔다. 인수자금은 기독교복음침례회, 일명 구원파 신도들의 자금인 것으로 전해진다. 5년 뒤 이 회사는 구약성서의 ‘모세’의 이름을 따 ‘세모’라는 회사로 탈바꿈한다.
세모는 5공 시절 사업을 급격히 팽창시켰다. 건강식품 다단계 판매에 선박제조, 해상여객운송, 자동차 부품업과 건설 및 부동산업에도 진출했다. 유 전 회장은 특히 해상운송업을 주력 사업으로 키우는 데 공을 기울였는데 1985년 한강 유람선 사업권을 따내는 것을 시작으로 88~89년 한려개발, 영광개발 등으로부터 쾌속선을 인수하면서 서해안과 남해안 일대 20여개 항로를 장악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금융권으로부터 쾌속선 인수대금 200억원을 불과 5일만에 조달하기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금융권의 도움을 받은 세모는 1990년대 중반까지도 거침없이 질주했다. 세모는 식품, 전자, 유람선, 해운, 화장품, 조선, 자동차부품, 건설, 무역 등 9개의 사업본부를 두고 사업을 확장해갔다. 한국일보가 확인한 세모의 법인 등기부등본에 따르면 90년대 중반 세모의 사업 목적은 광고업, 대지조성사업, 축산업, 컴퓨터 및 주변기기, 먹는샘물 수입업 등 무려 51개에 달했다. 세모해운, 세모케미칼, 세모유람선, 클럽하이랜드 등 8개의 계열사도 거느렸다. 이렇게 확장하기까지 당시 경기은행은 1,000억원에 달하는 대출을 지원했고 외환, 조흥(현 신한은행)과 2금융권(600억원)까지 합하면 총 2,000억원이 넘는 자금이 세모에 투입됐다.
더 놀라운 건 세모의 법정관리 이후에도 금융권이 유 전 회장 일가의 든든한 지원군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세모는 99년 법정관리에 들어갈 당시 채무총액인 3,835억원 중 2,876억원을 2008년까지 갚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법정관리를 졸업하기 직전(2007년말)까지 실제로 갚은 금액은 1,590억원에 그쳤다. 목표치의 절반밖에 이행하지 못했지만, 금융권은 나머지 빚 1,100억여원을 출자전환해주는 데 합의했다. 사실상 빚을 탕감해준 것이다.
세모의 법정관리 졸업도 금융권의 이해하기 힘든 대출로 가능했다. 유 전 회장 측 인물을 중심으로 2006년 설립된 새무리는 2008년 1월 다판다, 문진미디어 등과 컨소시엄을 이뤄 세모를 336억여원에 인수하는데, 이 과정에서 기업은행과 농협중앙회는 연대보증만으로 각각 95억원과 128억원을 단기 대출해줬다. 다판다는 장남 대균씨가 지분 32%를 보유하고 있다. 유 전 회장 차남 혁기씨가 대주주인 온지구 역시 금융권에서 대출을 받아 부도가 난 세모의 자동차사업부를 사들였다.
부도와 법정관리로 산산이 쪼개질 법한 세모가 유 전 회장 일가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다시 지분관계, 거래관계로 관계사들끼리 뒤섞여 막후 지배하는 과정에서 금융권이 지원한 자금은 2,000억원 이상. 청해진해운이 세월호를 매입하고 증축하는 데 소요되는 100억원의 자금은 산업은행이 담당했다. 50여 관계사 서로가 매출발생, 지급보증, 담보제공 등을 서주면서 금융권 자금을 제 호주머니에서 빼듯 사용했다. 대표적으로 온지구의 경우 작년 말 현재 국민, 대구, 외환, 기업, 농협은행 등과 효성캐피탈, 현대커머셜에 총 334억원에 달하는 특수관계자에 대한 지급보증을 서줬을 정도다.
세월호 사태로 인해 문제가 커지자 금융권은 부랴부랴 대출을 회수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갑자기 대출을 회수할 경우 관계사들의 줄도산도 우려되는 상황이다. 금융권의 한 공인회계사는 “세모그룹의 성장과 법정관리 졸업, 이후 다시 유 전 회장이 관계사를 지배하는 과정에 자의든 타의든 금융권이 큰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청해진해운 관계사 여러 곳에 대출을 해준 은행 관계자는 “담보가 확실하고 매출도 있어 대출에는 하자가 없었다”며 “너무 복잡한 구조여서 유 전 회장이 배후에 있는지조차 몰랐다”고 해명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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