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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소한 공간 곳곳 꽉 채운 내밀한 행복… 은신처 꾸며 놓은 듯

입력
2014.04.29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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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유수암 주택 외부 전경
제주도 유수암 주택 외부 전경

어린 시절 집 안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 장롱에 숨어들어간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헐떡이는 숨을 누르며 장롱 안으로 들어가면 은밀한 조력자의 손이 문을 닫아 주고…눈 앞엔 캄캄한 천국이 펼쳐진다. 조금만 움직여도 합판에 부대끼는 어깨, 문이 열릴까 봐 힘껏 옹송그린 무릎. 장롱은 좁았고 그래서 작은 행복으로도 금방 꽉 찼다. 작아도 행복한 것이 아니라 작아야 행복할 수 있는 집. 제주도 유수암 주택에는 협소함의 행복이 곳곳에 숨어 있다.

편백나무로 둘러싸인 1인용 음악감상실
편백나무로 둘러싸인 1인용 음악감상실

“음악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주세요”

중학교 국어 선생님인 B씨에게는 오래 전부터 꿈꾸던 집이 있었다. 작은집과 그에 어울리지 않게 큰 마당. 제주 시내에서 아파트 생활을 해온 그에게 큰 집은 단순히 경제적 부담의 문제가 아니었다. “쓰지 않는 공간을 계속 이고 살아간다는 게 심적으로 부담이 됐습니다. 처음엔 열다섯 평 정도의 집을 생각했어요.” B씨는 꿈꾸던 집을 짓기 위해 이미 10여 년 전 애월읍 유수암리의 한 나대지에 땅을 사놓은 터였다. 그는 딸들이 출가하고 중학교 음악 교사인 아내와 둘만 남게 되자 본격적으로 건축가를 찾아 나섰다.

“한 마디로 건축가가 원하는 건축주였죠.” 유수암 주택을 설계한 홈스타일토토의 임병훈 소장은 2012년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를 통해 B씨를 만났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료하게 제시한 뒤 그 외의 일엔 일절 관여하지 않고 건축가에게 일임했다. 시공 중 자재가 바뀐다거나 외벽 색깔이 변경되는 등 건축주로서는 민감하게 받아들일 일에 대해서도 가타부타 말을 꺼내지 않았다.

B씨는 대신 “오직 음악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했다. 음악 교사인 아내부터 바이올린과 첼로를 전공한 딸들까지, 음악은 B씨 가족을 하나로 묶는 끈이었다. 아파트 생활을 하면서 가장 갈증을 느낀 부분도 좋은 환경에서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웃 눈치를 보느라 음악 소리를 높일 수 없는 건 물론이고, 거실이 주방을 향해 트인 구조 때문에 소리가 사방팔방 퍼져 나갔다.

“오디오를 방 안에 들여놓는다고 해도 아파트에 쓰이는 유리와 콘크리트 때문에 소리가 난반사됩니다. 그걸 조절할 수 있는 자재가 나무인데, 그 중에서도 편백나무는 음향 조절력이 좋아서 음악당의 내장재로 많이 사용되죠.”

건축가는 집 한 켠에 사면을 편백나무로 둘러싼 작은 음악 감상실을 만들었다. 소리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천장을 약간 높이고, 독립접지 방식으로 오디오에만 별도로 전기를 공급해 노이즈(소음)를 최소화했다. 공간에 놓인 것은 오디오 세트와 1인용 의자뿐. B씨는 소리에 영향을 끼칠까 봐 음반 수납장도 바깥에 내놨다. 온전히 소리가 주인으로 모셔진 공간에 B씨 부부는 객처럼 들러 음악을 즐긴다.

“남들처럼 비싼 오디오 세트를 사거나 전문 음악 감상실을 만들 여유는 없습니다. 다만 내 집이니까 좋은 음향을 위한 최소한의 환경을 설정할 수는 있죠.” 그는 아파트에서 쓰던 오디오를 그대로 가져왔는데도 “소리가 상대가 안 된다”며 어린애처럼 즐거워했다.

사실 작은집에서 용도가 하나뿐인 공간을 만드는 것은 매우 과감한 시도다. 이불을 펴면 침실이 되고 이불을 치우면 공부방으로 변하는 다용도 공간은, 작은집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덕목이다. 오직 소리를 듣는 데만 서너 평을 할애하는 호사가 가능했던 이유는 건축주가 거실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아니, 포기라기 보다는 거부에 가깝다. “소파, TV, 테이블로 구성된 거실은 처음부터 생각도 안 했습니다. 건축가에게 요구한 것 중 하나는 대한민국 아파트와 전혀 다른, 다양한 성격의 공간을 구현해달라는 거였어요.”

유수암 주택에는 그래서 거실이 없다.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에 주방 겸 식당이, 오른쪽엔 작은 실내 평상이 설치돼 있다. 서너 명이 둘러 앉을 수 있는 크기의 평상은 이 집에서 가장 많은 기능을 담당한다. 방석과 상을 놓으면 운치 있는 접객 공간으로 변신하고 손님이 없을 때는 독서, 식사, 수면 공간으로 다양하게 활용된다. 평상 안은 창고처럼 만들어 안 쓰는 물건들을 수납했다. 여름엔 특히 시원해 부부가 거의 살다시피 하는 곳이다.

평상 위 남는 공간에는 손바닥만한 다락방을 만들었다. “건축주가 집안 곳곳에 은신처처럼 틀어박힐 수 있는 공간이 있기를 바랐어요. 그래서 널찍한 다락방을 하나 만들었는데 몸을 계속 굽히고 있어야 하는 게 불편해서 천장을 좀 높여 아예 2층집으로 바꿨죠. 대신 평상 위 공간이 간이 다락방이 됐어요.” 임병훈 소장이 설명했다.

원래 설계도에 없다가 생겨난 공간이라 다락은 창문도 없고 어른 한 명이 누우면 꽉 찰 만큼 좁다. 그러나 유수암 주택에 놀러 오는 아이들에겐 단연 최고의 장소다. 아이들은 올라가봤자 별 것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사다리를 올라 좁고 어두운 다락이 주는 흥분감에 몸을 맡긴다. 다락에 열광하는 건 아이들뿐이 아니다. “여기 올라가 있으면 내가 집에 있는 줄 아무도 몰라요.” B씨의 장난기 어린 말을 아내가 받았다. “처음 입주했을 때 보름 동안은 침실 대신 여기서 잤어요. 꼭 이층 침대 같지 않아요?”

1층의 실내평상, 옆의사다리를 오르면 작은 다락이 나온다
1층의 실내평상, 옆의사다리를 오르면 작은 다락이 나온다

복도를 따라 조성된 ‘작은 책의 길’

집을 설계할 때 또 하나의 난점은 책 수납 공간이었다. 이사 오면서 3,000권이나 되는 책의 3분의 1 가량을 버렸지만 그래도 공간이 부족했다. 65㎡(약 20평) 크기의 1층은 음악 감상실과 침실, 거실, 화장실만으로도 이미 꽉 차 서재를 또 만드는 건 무리였다. 2층에 놓고도 남은 책을 수납할 장소로 건축가는 복도를 제안했다. 서재를 따로 만들지 말고 복도를 따라 책장을 설치해 책을 수납하자는 것이다.

음악 감상실에서 안방에 이르는 4m 길이의 통로는 이렇게 서재가 됐다. 한쪽엔 천장까지 서가를 짜서 책과 음반을 꽂고, 반대편엔 전시장에서 쓰이는 레일을 설치해 B씨가 취미로 찍은 사진들을 전시했다. 오래된 책과 음반으로 빽빽한 통로는 고색창연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비슷한 사례를 조사하다가 ‘책의 길(이일훈 건축가가 설계한 ‘잔서완석루’)’이란 것을 발견한 B씨는 이곳을 ‘작은 책의 길’이라고 불렀다.

‘작은 책의 길’의 백미는 통로 끄트머리에 놓인 책상이다. B씨는 복도가 책을 수납하는 곳에 머물지 않고 책을 읽는 공간이 되길 바랐다. 그는 벽에 작은 창을 내달라고 한 뒤 그 앞에 책상을 놨다. 의자에 앉으면 뒤쪽 서가에 등이 닿을락말락 한다. 복도를 꽉 채우고 앉으면 설렘과 차분함이 묘하게 교차한다. 좁고 어둑한 통로, 나이든 책들이 뿜어내는 낡은 공기, 작은 창으로 들어오는 비밀스런 빛은 어린 시절 꿈꿨던 완벽한 은신처를 떠올리게 한다.

집주인이 내부 공간만큼 중요시했던 것이 마당이다. 유수암 주택을 방문한 이달 중순에도 B씨는 마당에 잔디를 심느라 여념이 없었다. “내년이나 돼야 뻗을 것”이라며 숨을 돌리는 그는 텃밭을 일궈 양파, 대파, 부추를 심을 꿈에 벌써부터 부풀어 있다. 툇마루를 꼭 만들어달라고 한 것도 마당에서 일하다가 잠깐 걸터앉아 땀을 식힐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계획한 것은 두세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의 툇마루였지만 B씨가 도중에 마음을 바꾸면서 여남은 명이 앉아도 남을 만큼 넓어졌다. 땀을 식히는 것 외에 여러 용도로 쓸 수 있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부부는 지난해 여름 이곳에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종종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셨다. B씨는 “그저 먼 훗날의 꿈일 뿐”이라고 강조하며 마음 속에 담아뒀던 계획을 밝혔다. “나중에 여기서 작은 음악회를 열면 어떨까 싶어요. 학생들과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서 2, 3명의 연주자가 음악을 연주하고 학생들은 잔디 위에 텐트를 쳐 야영을 하는 거죠.” 그의 계획이 실현된다면 유수암 주택은 온통 억새로 둘러싸인 땅 한가운데 놓인 희한한 음악상자가 될 것이다.

집 안에는 추사 김정희가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조부로부터 물려 받은 ‘천화불염루’라는 글을 그는 “이 집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천화는 하늘에서 내리는 꽃인데 불법의 진리를 말합니다. 불염루는 세속으로부터 오염되지 않은, 마음을 청결케 하는 장소를 뜻하고요. 세상사에 휩쓸려 본질을 잊고 세속에 물들었을 때 이 집이 다시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하는 장소가 됐으면 합니다.”

제주=글ㆍ사진 황수현기자 sooh@hk.co.kr

작은집시리즈7. 제주도 유수암 주택/집 바깥에 조성된 툇마루/2014-04-29(한국일보)
작은집시리즈7. 제주도 유수암 주택/집 바깥에 조성된 툇마루/2014-04-29(한국일보)

유수암 주택 건축개요

●대지위치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대지면적 991.74㎡(300평) ●건물규모 지상 2층 ●건축면적 85.79㎡(25.95평)

●연면적 94.18㎡(28.49평) ●건폐율 8.65% ●용적률 9.50% ●최고높이 6.3m ●구조재 북미산 SPF ●지붕재 컬러강판

●단열재 그라울 단열재 ●창호재 독일식 ENSUM창호 ●외벽마감재 오메가플렉스, 적삼목 ●설계자 임병훈 홈스타일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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