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수 년 전 서울의 영국문화원에서의 일이다. 영국인 강사는 첫 수업시간의 20분을 ‘안전교육’에 할애했다. 자신은 이 교실의 안전책임자이며, 유사시 수강생 전원이 건물을 빠져나갔음을 확인할 때까지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다고 했다. 수강생들과 함께 비상구를 통해 탈출해 보는 모의훈련까지 했다. 참고로, ‘영어’ 수업이었다. 영국의 대학기숙사에 머물 때 일이다. 화재경보기가 워낙 예민하게 설정되어 있어서 빵만 태워도 경보가 울리곤 했는데, 소방관이 출동해서 이상 없음을 확인해줄 때까지 기숙사생 전원은 무조건 기숙사 밖에 나가 대기해야 했다. 그때마다 기숙사 층마다 배치된 부사감(층장)들의 활약이 인상적이었다. 그들은 방마다 사정없이 문을 두드려 기숙사생들을 깨웠고, 자기 층의 학생들이 완전히 탈출했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도 탈출할 수 있다고 했다.
직접 안전책임자가 되어 볼 기회도 있었다. 대학의 시험감독관으로 일할 때다. 시험감독 지침서 중 안전에 관한 지침은 무척이나 상세했다. 지침에 따르면, 나는 시험장의 안전책임자였고 경보가 울리면 정해진 경로에 따라 지정된 장소로 수험생들을 이동시키는 것이 나의 임무였다. 연구원이나 학생이 안전요원이 근무하지 않는 시간에 연구실 출입을 하려면 특별허가가 필요했다. 허가 조건은 딱 한 가지, 매달 2시간씩 안전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교육내용 핵심은 안전요원의 도움 없이 스스로 건물을 탈출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영국인 친구에게 슬쩍 말을 건네 봤다. “안전도 좋지만, 솔직히 너무 지나친 것 아니요?” 돌아온 답변이 놀라웠다. “우리는 1666년 런던 대화재를 기억하고 있소.” 자존심 센 영국인들의 허풍을 익히 알고 있기에 가볍게 웃어넘겼지만, 나중에 런던 대화재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알고 나선 충격을 받았다. 오늘날 런던에 석조건물이 즐비하게 된 것도, 건물 복도 사이에 이상하리만치 많은 문(방화문)이 설치된 것도, 사상 최초로 소방대가 창설되는 등 화재예방ㆍ진압에 관련한 각종 기술과 제도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도, 지금과 같이 유사시 상세한 매뉴얼이 작성되고 안전책임자를 훈련시키게 된 계기가 된 것도, 바로 런던 대화재였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비극적인 참사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너무 많았다. 씨월드화재, 서해훼리호사건, 삼풍백화점 붕괴, 세모유람선사고, 대구지하철화재, 대구가스폭발, 그리고 몇 달 전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까지…. 하지만 이러한 참사들이 안전에 대한 인식을 바꿔놓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번 사고에서 가장 큰 충격은 선장과 선원들이 태연히 구조선에 탑승하는 장면이었다. 왜 살아 돌아왔느냐고 억지를 부리는 게 아니다. 선실에 승객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뻔히 아는 선장과 선원들이, 갑판 위에서 구명복을 입고 승객들의 탈출을 돕다가 마지막에 바다에 뛰어들어도 얼마든지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아는 뱃사람들이, 어떻게 수많은 승객을 두고 구명보트에 오를 수 있느냐는 말이다.
일반인 수준의 책임의식조차 없어 보이는 세월호의 안전책임자들은 엄벌에 처해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처벌이 전부일 수는 없다. 위험이 예상되는 사회의 모든 곳에서 안전책임자들이 책임 있게 행동하려면 반복되는 훈련을 통해 어떤 상황에서도 제 역할을 할 수 있게 하는 안전에 관한 규범과 문화가 위험이 있는 모든 곳에 확고하게 자리 잡아야 한다. 이것이 구조화되려면 시간과 비용에 관한 사회적 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 효율성을 생명처럼 여기는 선진기업들이나 잘 사는 나라들이 안전에 대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이유를 굳이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우리에게도 어떤 변화의 계기가 마련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십수 년이 지나 누군가 “한국은 안전에 대해 왜 이렇게 유난스럽나요?”라고 물었을 때,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2014년 세월호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홍성수 숙명여대 법학부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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