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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게 피었지만 향기 없는 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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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드러지게 피었지만 향기 없는 꽃 같은…

입력
2014.04.27 1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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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같은 몸을 지닌 젊은 군주가 등장하고 무술에 능한 내시가 나온다. 왕의 비극적인 가족사 위로 궁중 암투와 핏빛 우정이 겹치고 살인청부업자의 애틋한 사랑이 포개진다. 배우들의 면면도 화려하다. 현빈이 제대 후 첫 스크린 나들이에 나섰고 정재영, 조정석, 조재현, 한지민, 김성령, 정은채 등이 모였다. TV 드라마 ‘다모’와 ‘베토벤 바이러스’를 만든 스타 PD 출신 이재규 감독이 이야기를 조절하고 배우들의 호흡을 조율했다. 제작비는 100억원이다. 대작이란 수식이 따르는 액수다. 영화 ‘역린’은 외관만으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하다.

이야기는 사실과 허구로 꾸려진다. 즉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개혁군주 정조(현빈)의 나지막한 독백이 영화의 시작을 알린다.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 정조와 궁궐에 몰아 닥칠 변괴를 예고하는 말이다.

자신을 향한 칼날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 정조는 상체를 드러낸 채 운동에 몰두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신체 단련을 게을리 하지 않는 정조의 예감대로 위기가 성큼성큼 다가온다. 정조의 젊은 할머니이자 노론의 수장인 정순왕후(한지민)가 은근히 정조를 겁박하고, 노론의 음모가들은 살수(조정석)를 고용해 왕의 목숨을 노린다. 어려서부터 정조를 보필해온 내시 상책(정재영)과 금위영 대장 홍국영(박성웅), 정조의 어미 혜경궁(김성령)이 역변에 맞선다.

영화는 화려하기 그지 없다. 백마 탄 정조가 벌판을 질주하거나 활을 쏘는 장면이 여성 관객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정조를 해하려는 무리와 왕을 지키려는 자들이 맞붙는 ‘존현각’ 장면에서 서사와 볼거리가 정점에 이른다.

평균 이상을 하는 배우들의 연기도 눈요기거리다. 현빈은 품위 깃든 연기로 왕의 기품을 구현한다. 두 개의 우정 사이에서 비극을 맞는 상책 역 정재영의 연기도 명불허전이다. 사랑 때문에 왕에게 칼을 들이대는 살수의 서러운 사연도 조정석에 기대 설득력을 얻는다. 살인청부업자를 길러내는 의뭉스럽고 비정한 인간 광백(조재현)도 눈을 잡는 캐릭터다.

드라마틱한 인물들이 대거 등장해 극적인 사건에 얽히고 설키는데도 영화의 호소력은 그리 진하지 못하다. 흐드러지게 피었으나 향기 없는 꽃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영화는 굴곡 많은 이야기를 밋밋하게 전한다. 정조와 상책의 군신관계를 넘어선 우정, 상책과 살수가 과거에 묻어둔 남다른 인연, 살수와 월혜(정은채)의 비밀스러운 사랑 등이 비슷한 비중으로 나열된다. 인물을 묘사할 때,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알려줄 때 영화는 매번 ‘플래시백’(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 이야기를 전개하는 영상기법)에 의존한다. 화법이 날카롭지 못하니 영화를 보는 내내 잘 닦인 직선대로를 135분(‘역린’의 상영시간) 동안 똑같은 속도로 달리는 기분이 든다.

좋은 식재료가 맛있는 요리를 보장하지 않는다. 적절한 레시피와 요리사의 손맛이 가미될 때 군침 도는 요리가 된다. 남부러워할 요소들을 한데 모아 만든 ‘역린’은 구미는 당기나 혀에 감동을 전하지 못하는 요리와 같다. 수작이 볼거리와 배우들의 연기로만 완성되지는 않는다. ‘역린’은 이 뻔한 진리를 모범적이지 못한 방식으로 방증한다. 30일 개봉, 15세 이상 관람가. 라제기기자 wender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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