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림반도에 이어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에서도 정부군과 친러시아계 무장세력 간 충돌이 격화하면서 미국ㆍ유럽연합(EU) 대 러시아의 신경전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서방은 “강도 높은 추가 경제제재를 취하겠다”며 러시아를 지속적으로 압박하고, 러시아는 천연가스 공급 중단 등의 카드로 맞불 작전을 펴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다.
일각에서는 조심스레 무력 충돌 가능성도 점친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25일 “대통령 임기 중 군사력 행사가 결정적인 해결책이 된 적은 별로 없었다”며 군사행동 자제 의사를 재확인했다. 대신 주요 7개국(G7)은 한 달 앞으로 다가온 우크라이나 대선을 무사히 치르기 위해 러시아 제재를 강화하기로 하고 28일 구체적인 내용을 검토한다.
현재로는 무력 충돌 가능성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대신 ‘말의 전쟁’은 갈수록 격화하고 있다. 상대를 제압하기 위한 실질적인 ‘무기’는 양측 모두 ‘경제’다. 승자는 어느 쪽일까.
정치색 짙은 카드로 탐색전
우크라이나 사태 초기 양측은 정치적인 성격이 짙은 경제제재를 우선 취했다. 크림공화국의 주민투표를 앞둔 3월 1일 러시아 병력의 크림공화국에 배치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방은 즉각 올해 6월 러시아 소치에서 열릴 G8 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예비회담 불참 의사를 밝혔다. EU는 3일 러시아에 항의하는 뜻에서 2007년부터 진행해 온 러시아와의 비자면제 협상도 중단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가 주민투표를 거친 크림공화국의 합병 요구를 받아들여 법적 절차를 21일 모두 마치자 서방은 17일 러시아의 G8 회원자격 정지, 러시아 주요인사의 자산동결 및 여행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20일 러시아 대통령 행정실장을 포함한 정ㆍ재계 인사 20명을 여행금지 대상에 추가했고, 이들을 지원하는 금융기관(방크로시야)의 자산도 동결했다.
러시아도 “미국과 EU가 성급하게 추진하는 대러 제재는 부메랑이 돼 돌아갈 것(3월 7일)”이라고 경고한 데 이어 서방의 제재조치에 즉각 보복제재를 취했다. 러시아는 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 미국 고위 인사 9명의 러시아 여행금지(3월20일) 조치를 내렸고, “이란 핵협상에서 서구의 명분 쌓기에 이용되지 않겠다”며 이란 핵협상 방해(19일) 의사도 내비쳤다.
하지만 서방의 초기 제재는 상징적인 것이 대다수라 실효성이 적다는 지적이 많았다. 제재 대상에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등 핵심 인물이 빠졌고, 직접 타격을 줄 산업에 대한 제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EU와 러시아의 비자면제 협상은 그 동안 별다른 진척도 없었던 사안이다.
제재 효과의 분수령은 에너지
양측이 지금까지 잽을 주고 받으며 탐색전을 벌였다면 이제는 상대의 급소를 겨누고 있다. 러시아가 대유럽 천연가스 공급 중단 카드를 실행에 옮길 것인지가 가장 큰 관건이다. 러시아는 지난 달 우크라이나의 가스 대금 연체를 이유로 우크라이나에 가스 수출 중단 의사를 밝혔고, 이달 10일에는 “상황의 시급성에 다른 비상대책도 있다”며 유럽 전역에 공급 중단을 시사한 바 있다.
유럽이 떠는 이유는 러시아의 천연가스 수입 의존도가 높아 자칫 치명타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발간한 세계 천연가스 생산 및 수출입 자료(2012년 기준)에 따르면 러시아는 세계 2위(6,560억㎥) 생산국이며 최대 수출국(1,850억㎥)이다.
특히 유럽은 전체 천연가스 수입량의 35%를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상황이다. 외신에 따르면 러시아와 인접한 핀란드와 구 소련에서 분리ㆍ독립한 발트 3국(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ㆍ리투아니아) 등은 전량(100%) 수입하고, 불가리아(85.4%) 오스트리아(65.6%) 폴란드(58.6%) 등 중부 유럽국가들도 절반 이상을 러시아에서 들여온다. G7 회원국인 독일(40.0%) 프랑스(15.1%) 이탈리아(25.1%)도 상당량을 러시아산으로 충당하고 있다.
사정이 이렇기에 러시아가 천연가스 수출을 중단할 경우 유럽은 직격탄을 맞을 수 밖에 없다. 실제로 러시아는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나 가스공급을 중단한 바 있다. 당시 러시아는 유럽에 수출하는 가스량의 80% 이상이 통과하는 우크라이나에 “약 1억㎥의 천연가스를 불법으로 유출하면서도 시정조치가 없다”며 가격을 4배 이상(1,000㎥ 당 50달러→230달러) 인상 방침을 밝혔다. 우크라이나가 이를 거부하자 러시아는 2006년 1월 1일부터 3일간 가스를 공급했다. 다행히 4일 양측이 합의를 봐 최악의 사태는 면했다.
그러나 2009년에는 달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 가격 협상에 실패하자 1월 1일부터 우크라이나에 가스공급을 중단했고, 이어 우크라이나가 유럽으로 연결되는 가스관을 차단하며 맞대응 하는 바람에 7일부터 우크라이나를 거쳐 유럽으로 가는 가스 공급도 중단했다. 러시아와 EU 사이에 매설된 천연가스 수송관은 모두 7개이며 그 중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는 가스관 3개가 전체 수송 가능량의 66%를 차지한다. 이런 사태는 13일간 계속돼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유럽 상당수 국가가 발전과 난방에 차질을 빚어 주민들이 추위에 떠는 최악의 ‘가스대란’이 벌어졌다. 더욱이 2008년 리먼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와 맞물려 국제 유가가 요동치며 한동안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EU의 에너지 러시아 의존 탈피 가능할까
유럽은 러시아 의존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을 시작했다. EU 수뇌부는 지난달 20일 “러시아산 가스 의존도를 낮추고, 에너지 공급선 다변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미국도 법안을 마련해 유럽에 천연가스를 수출하겠다며 나섰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중장기적인 것으로 당장 효과를 보기 어렵다. 미국은 셰일가스 붐 영향으로 2009년부터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최대 천연가스 생산국(6,810억㎥)으로 올라섰지만, 국내 수요가 높아 수입(430억㎥)하는 상황이다. 현 생산증가 속도를 유지한다고 하더라도 2016년부터 천연가스 수출이 가능할 것으로 예측된다. 또 원거리 수송에 따른 가격경쟁력 하락, 얼마나 많은 양을 유럽에 공급할 수 있을지 등도 문제다. 독일 전력기업 에이온의 요한 타이센 사장은 “유럽과 러시아는 40년 이상 에너지 협력관계를 구축해 왔다”며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유럽 기업들은 각개 격파에 나섰다. 러시아 국영 가스프롬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천연가스를 유럽에 수출하는 노르웨이 국영 석유회사 스타토일은 원유가에 연동해 산정하던 천연가스 가격을 상대적으로 저렴한 유럽 가스 가격에 연동하는 방식으로 바꾸기로 했다. 가격인하 효과로 가스프롬과 거래하던 고객들을 유치하겠다는 의도다. 프랑스 에너지기업 토탈과 GDF수에즈는 영국 등에서 셰일가스 개발을 본격화해 조달 루트를 다양화할 방침이다.
미국이 셰일가스를 대량으로 생산하면 국제 에너지 안보 환경이 변화할 가능성도 높다. 미국을 비롯한 새로운 공급국의 등장해 비전통 액화천연가스(LNG)와 러시아산 파이프라인 천연가스 경합 구도가 강화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면 그 동안 가스 공급을 외교적 무기로 활용해온 러시아의 대 유럽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약화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 “경제제재 오래 버티기 힘들 것”
미국과 유럽의 경제제재는 ‘실효성 없다’는 일부 비판과 달리 러시아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국 BBC에 따르면 러시아에서는 올해 1분기에만 630억 달러의 자본이 빠져나갔다. 미국 신용평가기관 스탠더드&푸어스(S&P)는 25일 “지정학적 위험도 증가가 자금이탈과 경제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며 러시아 신용등급을 ‘BBB’에서 ‘BBB- ’로 강등했다. ‘BBB-’는 투자적격 등급 중 최하등급이다. 안톤 실루아노프 러시아 재무장관은 “러시아 경제가 2008년 이후 가장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며 “올해 경제성장률이 0.5%로 하락하거나 정체(0%)될 수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는 4, 5%대 고성장 추세가 꺾여 지난해 1.3%에 머물렀다.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가 더 군사적으로 우크라이나에 개입한다면 산업 분야별 제재 조치를 취해 더 큰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고 공언했다. 여행금지 및 자산동결 대상에 푸틴 대통령을 포함할 수도 있고, 러시아가 취약한 제조업을 타깃으로 삼을 수도 있다. 다수의 전문가들이 “러시아가 단기적으로 버틸지 몰라도 오래가기 힘들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EU가 제1교역국인 러시아에 함부로 제재를 취하지 못할 것이란 분석도 나온다. 서방 국가들이 러시아와 무역 투자 금융시장을 통해 긴밀하게 연관돼 있어 강경 제재가 부메랑 효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독일 등 일부 유럽 국가들은 자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러시아 경제제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주한유럽연합대표부 관계자는 “EU의 주요 의사결정은 한 회원국이라도 반대하면 불발되는 만장일치 체제이기 때문에 치열한 논쟁을 통해 일단 방침이 정해졌다면 다소 시간이 걸릴 뿐 예정대로 진행된다”고 말했다. 민지영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러시아ㆍ유라시아팀 연구원은 “서방의 제재에 러시아가 자국의 주요 수출품인 곡물과 에너지 수출 중단으로 맞설 경우 2008년 경제위기 이후 회복 국면으로 접어든 세계경제에 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우한솔 인턴기자(이화여대 언론정보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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