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도 될까?’ 텐트 앞에서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파란색 텐트 입구를 붙잡고 우물쭈물한 지 몇 분이 지났을까. 눈 딱 감고 앞을 디뎠다. 어지럽게 펼쳐진 이불과 담요더미들, 백팩을 멘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경계와 의문을 품은 10여명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 구석에 앉아있던 김민영(17ㆍ가명)양 부모님이 손짓을 했다. 태연한 척 스티로폼 매트를 가로질러 들어가 백팩을 내려놓고 털썩 앉았다.
세월호 침몰 엿새째인 지난 21일. 전남 진도군 팽목항 한 켠에 자리한 실종자 가족대기소에 들어가는 길은 지금껏 겪었던 어떤 취재 현장보다 식은땀 나는 길이었다.
실종자 가족들이 피붙이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진도 실내체육관과 팽목항에는 늘 팽팽한 긴장감이 감돈다. 기자들 사이에서는 가방 메지 말 것, 취재수첩 꺼내지 말 것 등 암묵적인 수칙이 있을 정도다. 신문사 취재 기자는 그나마 나았다. 카메라를 끼고 다니는 사진기자나 유니폼까지 입은 방송국 기자는 공공연한 배척의 대상이었다. “방송국 카메라 전부 나가!”라는 외침이 들리기 일쑤였고, 오열하던 가족들을 찍던 카메라는 몇 개씩 깨져 나갔다. 기자생활 4년, 언론을 향해 이렇게 강한 분노와 불신이 쏟아지는 걸 겪은 일이 없다. 기자들은 가족들에게 감히 말을 걸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귀동냥으로 취재를 했고 자원봉사자들이 나눠주는 식사를 받아 먹을 때도 최대한 말을 아꼈다.
민영양의 부모님을 어렵게 설득해 1박2일 동행 취재를 하게 된 뒤에도 말 한마디, 발걸음 하나조차 조심스러웠다. 텐트 안의 다른 실종자 가족들은 끝까지 경계심을 풀지 않았다. “이 기자가 내 얘기 왜곡 안 하고 그대로 쓸 거라고 보장받고 인터뷰 하는 거예요?”그럴 때마다 민영양 어머니 현숙(56ㆍ가명)씨가 변호를 했다.
현숙씨는 사고 소식을 처음 듣고 건성 피부인 아이에게 발라줄 알로에 로션과 갈아 입힐 옷가지, 놀랐을 아이에게 먹일 청심환을 준비했다고 했다. “그 청심환을 내가 먹을 줄 몰랐지.” 씁쓸하게 웃는 그의 모습에, 밥 한 술 못 뜨다 “깜깜한 데 있는 우리 애기가 어떻게 혼자 오지?”라며 정신을 놓았다는 아버지의 이야기에 절로 눈물이 터져 나왔다.
먼저 아버지와 약속했던 인터뷰를 시간이 지나자 어머니가 주도했고, 언니 아영(22)씨와 민영양의 이모, 삼촌까지 합세했다. 한번 터진 말문은 끝없이 이어졌다. 내 앞엔 “힘내서 기사 잘 써야 한다”며 그분들이 내 놓은 초콜릿과 두유, 과자, 김밥 등이 쌓였다.
“우리 관할이 아니다.” “잘 모르겠다”…. 실종자 가족들은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정부’ 혹은 ‘당국’의 무관심에 크게 상처받았다고 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처럼 1분 1초가 급했던 사고 첫 날 구조 작업은 한없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데도, 진도 실내체육관을 찾은 한 정치인은 “정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격분한 현숙씨는 맨발로 단상 위로 뛰어 올라가 “네 새끼가 (바다 속에) 들어가 있어도 이렇게 하겠냐”고 울부짖었다. 그는 “그렇게 악쓰는 나를 쳐다보는 그들의 표정이 너무나 태연해 더 속이 터졌다”고 했다. 무신경함은 곳곳에서 돌출돼 실종자 가족을 때리고 있었다. 민영양 언니 아영(22)씨는 “어떤 사람들은 실종자 가족인 우리에게 ‘유가족들 하나라도 더 챙겨드려’라고 말했고, 언론은 실종자 가족 사연으로 소설을 써댔다”며 분노했다.
주차장에서 팽목항으로 이어지는 길 한 쪽에는 인양된 시신을 가족이 확인하는 하얀 텐트가 줄지어 서 있다. 팽목항으로 들어가려면 반드시 그 앞을 지나야 한다. 사고 발생 일주일째인 22일에도 오후 늦게 인양된 시신 확인을 위해 텐트마다 불이 밝게 켜져 있었다. “우리 애기 어떡하니….” “아이고….” 텐트 여기저기에서 통곡 소리가 동시에 터져 나왔다. 텐트 앞에 폴리스 라인을 잡고 선 경찰들도, 그 앞을 지나던 기자들도, 아무도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였다. 이 아픔에 모두가 공감할 수 있었다면 조금은 달라졌을까. 먹먹함에 침묵만 흐르는 가운데 하늘에 별만 무섭게 빛났다.
박소영기자 sosyo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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