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매화에 매혹을 처음 가진 건 어린 시절 어머니가 정성스레 마당에 키우시던 백매화 한 그루에서 비롯되었다. 당시로선 어머니의 지극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봄날 매화가 피기 시작하고 그 향기가 서성거릴 때마다 어머니의 매향(梅香)에 대한 고집을 조금은 헤아려보려 한다.
춘삼월이 되면 단속사 터에 은근한 향기를 절터 가득 흩뿌리는 정당매는 수령 640년이 된 백매화이다. 이 고매(古梅)는 현존 한국 최고(最古)의 백매화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백매화의 반대편에 있는 홍매화는 통도사에 가야 좋다. 우중홍매(雨中紅梅)는 빗속에 핀 홍매의 그윽함 쪽이다. 개인적으로 금둔사의 매화도 그 청량함에서 비교할 수 없는 매혹이 있지만, 빗물에 번지는 연분홍 홍매화의 연산홍을 보기 위해서는 통도사를 택하는 편이 낫다. 금둔사의 청매화가 홍빛을 얻기 전 연둣빛 매실 같은 맑은 기운이라면 통도사는 빗물에 꽃잎을 떨고 있는 설명하기 힘든 불계(佛界)의 기운을 닮아 있다.
심매행(尋梅行)에 빠져 눈이 멀면 처마에 맺힌 빗물 속에서도 붉은 매화열매의 빛깔을 볼 수 있다. 두 눈에 분홍이 드는 것이다. 가는 비가 내리는 저녁에 통도사에 당도하면 붉은 매화의 향기에 마음을 베이게 된다. 우리나라 토종매화는 그 개화시기에 걸맞게 고유한 명칭이 따로 붙어 있을 만큼 다양하기로 유명하다. 이를테면 몇 백 년이 넘은 매화로 알려진 선암사의 원통전이나 무전 주변의 선암매(仙巖梅), 통도사의 자장매(慈藏梅), 지리산의 삼매, 산천재의 남명매(南冥梅), 남사마을의 원정매(元正梅), 단속사지의 정당매(政堂梅)등이 있다고 한다.
매화는 매화로서 진하다. 빗속에 통도사의 홍매화를 보고 있노라면 가물거리는 어떤 한기가 마음속에서 전해진다. 그건‘ 한평생을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겠다’는 이 꽃의 고집 때문이 아니라 내 안의 어떤 캄캄한 돌담이 저 붉은 꽃잎을 타고 너무 먼 곳으로 흘러가버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서늘한 그늘에 자신의 얼굴이 닿고 있기 때문이다. “저 매화는 이렇게 혼자 오는 자에게 속삭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이 바람아 내 꽃그늘에 쉬었다 가렴,” 그런 게 꽃 대궐에 와있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보곤 하는 것이다.
물기를 머금은 새들이 처마 아래 뿌옇게 매달려 있다. 꽃망울은 봄물을 품은 채 떨고 있다. 멀리 붉은 산허리가 번져있다. 밤이면 매화의 꽃그늘은 어두워진다기보다는 지상에서 조금씩 멀어져 간다는 생각이 든다. 마당 돌 수조 속의 돌거북이 누는 오줌처럼, 조금씩 희미해지면서 연인을 만나기 위해 휘돌아 석탑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가혹한 누군가의 운명처럼.
매화는 그 꽃그늘에도 향기가 스며 있다. 맷돌에도 그 위에 앉은 참새의 발자국이 조금씩 고이듯이, 아침의 비린 꽃향기는 꽃의 것이 아니라 바닥의 돌에 스민 꽃그늘의 냄새이다. 돌에서 올라온 홍매화의 꽃그늘은 색정(色情)이 없지만, 그 정인(情人)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자들의 심사에 가깝다. 색(色)이 물러난 자리에 담백한 꽃잎이 머무는 자리가 사랑이다. 그건 1,400년이란 시간이 묻혀 있는 ‘무풍 한송’의 내력이다. 비바람에 형태를 조금씩 잃어가는 공양상의 여래불 손바닥에도 꽃그늘은 스민다. 처음엔 몸돌이었던 것이 무릎만 남도록 꽃그늘을 다 받아주었구나, 매화의 향기를 가져갈 것이냐? 매화의 그늘을 가져갈 것이냐? 묻는다면 나는 후자 쪽이다. 추위가 다 물러나기 전, 이미 꽃망울을 넘어서려는 이 꽃의 한기에 우리가 보태줄 수 있는 것은 어떤 종류의 감복이 아니다. 자기 안의 어떤 종류의 암자를 들키는 기분이다. 암자는 자신의 마음을 구입하기 위해 자신의 마음에게 구걸을 해야 하는 처소가 아니던가. 통도사엔 암자가 19개나 있고 웬만한 절집보다 그 규모가 큰 서운암이나 취운암같은 곳도 있지만, 아직 제 주인이 찾아오지 않는 암자가 많다. 그 암자는 누구의 것인가? 누가 그곳으로 들어가 가득 고인 매화의 꽃그늘에 산길을 비추는가? 몇 개의 줄기는 세월 속에 고사하였고 남은 1개의 줄기에서 매화 꽃망울이 맺힌다.
김경주 시인ㆍ극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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