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침몰 뒤 25일까지 열흘간 이뤄진 정부의 실종자 구조ㆍ수색 작업은 구조자 숫자를 한 명도 늘리지 못했다. 최고 전문가라는 해경과 해군에 대해 실종자 가족들의 불신이 깊어지고 작업 방법에 혼선을 겪으며 민간 잠수사들과 불화까지 겪는 등 수색 작업도 초동대처만큼 난맥상을 드러냈다.
구조작업에서 실종자 가족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한 문제는 선내 잠수 수색이 너무 늦었다는 점이다. 16일 오전 9시54분 세월호의 좌현이 침수돼 더 이상 자력으로 승객들이 탈출할 수 없었던 때부터 이미 잠수인력의 선내 진입은 절실하게 필요했다. 하지만 잠수 장비와 인력이 도착하지 않아 약 300명을 품고 가라앉는 배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오후 5시쯤에야 해경과 해군 잠수요원이 도착했으나 강한 조류에 막혀 결국 물 속으로 뛰어들지 못했다. 선실 내 공기(에어포켓)에 대한 기대가 있었던 침몰 당일 절체절명의 순간은 이렇게 허무하게 지나갔다.
선내 진입이 이뤄진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현장을 방문하고 난 다음날인 18일 오후였다. 사고가 난 지 48시간도 더 지난 시점이었다. “뒤늦은 수색작업조차 대통령이 움직여야만 하느냐”는 비판이 쏟아졌다. 그 동안 해경은 “조류가 강하고 시야가 나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나마 18일에는 화물칸 문을 여는 데까지만 성공했다. 객실에 진입해 처음 시신 3구를 발견한 것은 또 다시 하루가 지난 19일 밤 11시 48분이다.
민간 잠수사 참여 문제는 지금까지 갈등 중이다. 민간 잠수사들이 물 위에서 산소호스를 연결한 머구리 방식의 작업으로 더 오래 잠수할 수 있다고 주장했지만 해경은 처음에 이를 거부하다 21일에야 시작됐다. 자발적으로 찾아온 민간 잠수사들은 구조당국이 잠수 기회를 주지 않자 짐을 싸 초기 300명이 넘던 것이 25일 20~30명만 남았다.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해운이 계약한 언딘 마린 인더스트리가 구조작업에 참여하면서는 특혜 의혹도 불거졌다.
해경의 입장도 이해할만한 면은 있다. 조류가 거센 해역에서 또 다른 사고가 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해경은 해군 잠수요원이 가이드라인을 설치한 뒤에야 민간의 참여를 허용했다. 연속 20시간 작업이 가능하다는 수중 장비 ‘다이빙 벨’을 허용하지 않은 것도 선이 엉킬 수 있다는 위험 때문이다.
하지만 야간 수색작업을 위해 조명탄 대신 채낚이어선을 동원하는 등 실종자 가족들의 요구를 뒤늦게 실행에 옮긴 것도 많아 군경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는 믿음을 사지 못했다. 정부가 동원한 무인잠수로봇(ROV)과 게 형태 무인탐사로봇 ‘크랩스터’ 등 첨단 장비도 별 효과를 얻지 못했다. 분노한 가족들이 20일 새벽 청와대 항의방문을 시도하다 경찰에 저지당하는 일도 빚어졌다.
여기에 부실한 신원 확인으로 18일 발견된 단원고 학생 정모군의 시신이 6일간이나 장모군 빈소에 안치되는 등 학생 시신도 3번이나 바뀌어 유족들 가슴에는 또 한번 상처가 남았다.
세월호 침몰 후 열흘. 차가운 바다 속에는 아직 100명이 넘는 실종자가 남아 있다.
김창훈기자 chkim@hk.co.kr 진도=이성택기자 highno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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