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사실 어떤 이야기도 꺼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떠올리기 수치스러운 대형 재난의 순간들이 결코 적지 않았지만, 이것은 또 다른 참담함이다. 그 많은 아이와 어른을 가득 태운 여객선이 옆으로 누워 가라앉는 것을 실시간으로 뻔히 지켜보면서 그저 멍하니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던 죄책감과 분노도 그렇지만, 세월호의 침몰과 함께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허언과 망언들은 더더욱 지켜보는 이들을 절망과 무기력으로 몰아넣는다. 피해자들이 겪었을 고통과 가족들의 심정은 가늠조차 하기 힘든 것이다. 어쩌면, 아니 이제는 명백하게 간절한 바람과 같은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지만, 그보다 더더욱 명백해진 현실의 비루함을 똑바로 직시하고 추잡하게 가려진 진실과 무지한 관행, 부패의 썩은 속내를 들추어내는 것, 최소한의 도의조차 보일 줄 모르고 몸 사리기에 급급한 정부도 제 할 일을 하는 것만이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조금이나마 수습하는 길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한 개개인이 짊어진 이 공동의 상처를 어떻게 보듬고 앞으로 나아갈 것인지도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어지러운 마음을 밀어내며 읽지 못하고 있던 사물유람(현실문화, 2014)을 펼쳐본다. 사물유람은 독립 큐레이터로 일하며 지난해 11월에 문을 연 전시공간인 ‘시청각’을 공동 운영하는 현시원 씨의 새 책이다. ‘눈사람은 쌩쌩한 바람이 부는 겨울 거리에 선 보온병이다. 일자로 뻣뻣하게 서서 제 몸은 차가운 눈덩이지만 세상에 온기를 뿌린다’와 같은 문장들을 보면서 조금은 숨을 쉴 수 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과일 행상 천막, 가정용 재봉틀, 진동 알림 벨, 빗자루, 아이스크림 냉동고, 자기소개서, 동상과 간판 등등 저자의 표현을 빌자면 ‘숱하게 눈에 밟히고 발에 채는 세상에 아주 많이 있는 형태’들이 삐뚤삐뚤 엉뚱해 보이는 자신만의 질서를 가지고 늘어서 있는 형국이다.
‘빗자루’의 장(章)에서 저자는 소도시에 거주하는 빗자루 장인을 만나러 가는 길에 마주친 빗자루들을 눈으로 찾아보며 헛된 수집에 몰두했던 기억에서 시작해서 플라스틱 빗자루를 들고 골목을 청소하는 여성 정치인의 선거활동을 기록한 어색한 보도사진을 들어 실제로 먼지를 닦는 운동이 제거된 유권자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 동작의 엉성한 면면을 꼬집는다. 그리고 빗자루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점점 제 건강과 안위를 챙길 여유가 없는 계층을 표상하게 되는’ 사물의 처지를 술회한다. ‘비둘기 풍선’에서는 불안하게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평화 기원의 임무를 맡고 하늘로 발사된 수많은 사물을 상상하며 아주 잠깐이라 해도 위안을 주는 것들의 필요를 말한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스펙터클에 동원되기 시작한 비둘기에서 비둘기의 자리를 대체하느라 바빠진 비둘기 풍선의 이벤트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거리의 삼색 셔터’라는 제목의 글에서는 하나의 사고 과정으로서의 포장꾸러미를 제시한 뒤 셔터가 과연 하나의 사물로 도약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고 병풍과 셔터를 비교 분석한다.
그녀에게 사물은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어떤 대상이라기보다는 ‘인간과 사물의 사이를 오가는 비밀스러운 신호’다. 이 신호를 읽는 것은 글쓴이 자신과 세상, 그리고 그 사이의 관계를 읽거나 맺는 것이기도 하다. 그녀의 시선은 살고있는 동네에 위치한 사직단의 지도 그림이 바뀐 것도 놓치지 않고 큐레이터답게 각각의 지도에서 다르게 드러난 화풍이 뜻하는 의미를 읽어주기도 한다. 이는 주변을 돌아보고 관찰하며 건네는 따뜻한 호기심이 없이는 불가능한 탐험이기도 하다. 사물유람의 세계에서는 그 무엇도 무미건조하거나 고립되는 일은 없을 것만 같다. 실종된 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차갑게 식어서 돌아온 아이가 손에 꼭 쥐고 있었다는 네모난 학생증은 그 어떤 언어의 전달보다도 가슴을 두드리는 간절한 신호이다. 우리는 이 신호에 어떻게든 화답해야만 할 것이다. 신속하고 엄정한 후속 조치들이 필요한 만큼 섬세한 마음의 쓰임도 귀한 시간이다.
이정민 미술작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