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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의 기억'을 치유하려면

입력
2014.04.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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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면서 겪는 대부분의 일은 기억의 형태로 우리에게 남는다. 하지만 인간의 기억은 마치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서 필름에 옮기듯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마음 상태와 주위의 환경에 따라 영향을 받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해간다. 그래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이 각기 다른 기억을 갖게 되기도 하고, 한 사람 안에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의 내용이 달라지기도 한다.

평소 우리는 각자의 기억 저장고 속에 하루하루 일상의 경험들을 넣어 가면서 살아간다. 하지만 트라우마와 같은 경험은 쉽게 기억 저장고에 들어가지 않는다. 말로 설명하기조차 힘든 경험은 한동안 혼란스러운 과정을 거쳐 기억 속에 자리 잡기도 하고 오랜 시간 심리적으로 통합되지 못할 수도 있다. 세월호 침몰사고는 아직 진행 중이고 그 충격이 너무도 커 아직 대부분 개인의 기억이나 집단의 기억 체계에 통합되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또 많은 사람에게 그 어떤 것으로도 치유되기 힘든 아픈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생존자들과 유가족들, 그 외 직간접적으로 이 사고와 관련된 사람들이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잘 견딜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최소한 그들의 기억이 지금보다 더 아픈 기억으로 남지 않도록 주위에서 배려해야 한다.

큰 충격을 겪은 후에는 여러 가지 몸과 마음의 변화들이 함께 작용한다. 생존자들과 실종자 가족들, 그리고 유가족들은 하루에도 슬픔과 분노, 죄책감과 같은 수많은 감정이 떠오를 것이고 때론 그 감정들이 너무 압도적이어서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 심리적 마비 상태에 빠질 수도 있다. 일부 생존자들은 자신이 살아남은 것에 대한 미안함에 스스로를 자책하며 본인의 고통스런 정서를 겉으로 드러내지조차 못한다. 하지만 이 모든 과정은 사람들이 평소 가지고 있던 기억 저장고에서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겪었을 때 나타나는 당연한 반응들이어서 병리화하지 않아야 한다. 아직 트라우마의 기억이 채 공고히 자리잡지 않았을 때 주위에서 어떤 ‘증상’, ‘생존자 증후군’,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기억 속에 스스로를 무력한 존재로 남기게 될 여지가 있다. 아동과 청소년의 경우 특히 재난이 발생했을 때 주위 어른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함으로써 상황을 이해하려 하기에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안정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향후 이 사고에 대해 어떤 기억을 갖게 되는가에 큰 영향을 준다.

세월호 사고 이후에 언론에서 청소년들이 앞으로 기성세대를 불신하게 될 것으로 보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번 사고에서 안전대응체제가 실패한 것은 청소년들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분노와 배신감을 느끼게 했다. 특별히 청소년들에 초점 맞춰 향후 기성세대를 불신하게 될 것으로 언급하는 것은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청소년들에게 이번 재난을 세대 간 갈등으로까지 기억하게 할 수도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사고의 당사자들이 이 아픈 기억을 스스로 정리하고 통합할 수 있는 시간과 여건을 충분히 마련해줘야 한다. 개인차가 있겠지만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고 대비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은 사고의 당사자들에게 언제든지 당신의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돼 있다는 열린 자세를 보여 줘야 한다. 특히 당시의 기억으로 고통받는 생존자에게 ‘잊어버려라’ ‘툭툭 털어버려라’ 라고 강요하는 것은 좋지 않다. 반대로 당시의 기억을 억지로 이야기하게 할 필요도 없다. 본인이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싶어질 때까지 옆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특히 사고 당사자들에 대한 장기적인 심리적 지원 계획이 필요하다. 흔히 재난이 발생했을 때 초반엔 많은 지원과 관심이 쏠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사라진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기억은 상당히 오랫동안 지속하기에 실질적 지원은 트라우마의 기억이 치유되는 기간만큼 이어져야 한다. 단기적인 관심이 아니라 견고하고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통해 이번 사고는 우리가 모두 함께 아픔을 공유하고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사회적 기억으로 만들 수 있길 바란다.

안현의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ㆍ한국심리학회 재난심리위원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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