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밤 12시쯤 서울 남대문 시장 골목. 평소 같으면 술자리를 파하고 귀가하려는 직장인들로 붐빌 시간이지만 빈 택시들만 수십대 서 있었다. 한 택시기사는 “요즘 거리에 진짜 사람들이 없다”며 “세월호 참사 때문에 누가 술 마시고 놀 생각이나 하겠냐”고 말했다.
같은 시각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인근 먹자골목도 비슷한 풍경이었다. 군인과 직장인들의 회식으로 떠들썩할 시간이지만 50m가 넘는 골목길에 행인은 4,5명에 불과했다. 이 골목에서 주점을 운영하는 이모(55)씨는 “군인들의 영외식사, 음주ㆍ회식 자제령이 내려진 후 손님이 크게 줄었다”고 말했다.
세월호 침몰 사고 여파로 회식, 여행 등을 취소하는 시민들이 늘고 있다. 온 나라가 슬픔에 잠기면서 유흥을 자제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지하철 분당선 미금역 인근에서 식당을 하는 이두(44)씨는 “인근 서울대병원에서 회식을 자제하라는 지침이 내려와 취소된 예약들이 많다”며 “사고 이전에 비해 매출이 20%쯤 떨어졌다”고 말했다.
황금연휴가 낀 5월초 여행을 준비했던 이들도 계획을 접는 사례가 늘고 있다. 2박3일 일정으로 울릉도 관광을 계획했던 김모(53ㆍ대구 수성구)씨는 “온 사회가 슬픔에 젖어있는데 놀러가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배편과 숙소예약을 모두 취소했다”고 말했다. 여행업계에 따르면 포항~울릉 간 여행 예약의 30%가 취소됐고, 제주, 진도, 목포로 가거나 경유하는 여행과 공무원 연수 등도 대부분 취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취소한 여행경비를 세월호 사고 피해자들에게 기탁한 사례도 있다. 팔순을 맞아 부부동반으로 다음달 영국 여행을 떠나려 했던 경남 창원의 노승팔(80)ㆍ안경자(74)씨 부부는 22일 동사무소에 여행비용 전액(500만원)을 내놓았다. 노씨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슬픔은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지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5월은 12월과 함께 공연 성수기지만 각종 콘서트는 줄줄이 취소됐고, 가수들은 음원발매를 중단하거나 연기했다. 공연기획자 이모(50)씨는 “일이 없어 걱정이지만 지금은 온 국민이 함께 자숙할 때인 것 같다”며 “나부터 공연을 보고 즐길 마음이 안 나는데 누가 공연을 보겠느냐”고 말했다.
중고생 학부모들은 부쩍 자녀들의 안전문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분당의 한 고교에는 자율학습이 끝나는 저녁 시간 평소 5,6대의 승용차가 대기했으나 최근엔 20대 이상 늘었다. 학부모 이모(49)씨는 “아이를 데리고 오며 평소 나누지 못한 대화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원가에는 자녀의 위치를 묻는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 한 학원 관계자는 “수업이 끝난뒤 자녀가 들어오지 않았다며 걸려오는 전화가 평소 10~20통이었으나 요즘은 40~50통”이라며 “부모들의 위치확인을 위해 휴대폰을 켜놓고 수업을 받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범구기자 ebk@hk.co.kr 변태섭기자 liberta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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