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르반테스 이후 스페인어권 최고 작가로 평가 받는 콜롬비아 출신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유골이 21일 수천 명의 애도 속에 멕시코 수도 멕시코시티 예술궁전으로 옮겨왔다. 지난 17일 87세로 타계한 마르케스를 멕시코시티의 가족묘에 안치하기 전 이곳에서 성대한 장례ㆍ추모행사를 치러 보내려는 것이었다.
행사는 멕시코와 콜롬비아 양국이 공동 주관했다.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소설가 한 사람을 떠나 보내려고 대통령 두 명이 모이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멕시코가 위대한 예술가들의 추모 장소로 자주 이용하는 예술궁전 로비에 안치된 마르케스의 유골함 곁에는 부인 메르세데스 바르차와 두 아들 곤잘로, 로드리고가 함께 했다.
소박한 도자기 항아리에 단 한 송이의 노란 장미로 장식된 그의 유골에 일반인 참배가 허용된 시간은 단 3시간. 이를 위해 수천명이 1㎞ 넘게 장사진을 만들어 기다렸다. 일반인 참관이 끝난 다음 거행된 장례식은 고인이 태어난 콜롬비아의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과 작가 생활의 기반이었던 멕시코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이 함께 주관했다. 멕시코와 콜롬비아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도 건립하기로 했다.
이날 마르케스가 태어난 콜롬비아의 카리브해 작은 마을 아라카타카에서도 따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아라카타카는 마르케스의 ‘마술적 리얼리즘’을 대표하는 작품 의 무대 마콘도의 영감이 솟아난 곳이다. 주민들은 마르케스가 조부모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자 현재 그의 생애와 작품을 전시하는 기념관 앞에 모여 추모의 시간을 갖고 마을 중심에 있는 교회와 묘지에 들러 다시 기념관으로 돌아오는 행진을 했다.
이와 별도로 콜롬비아 정부는 22일 수도 보고타의 성당에서 공식 장례식을 열었고 이 광경은 TV로 생중계됐다. 23일에는 콜롬비아 전국의 도서관과 공원, 대학에서 그의 초기 작품인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를 릴레이로 읽는 행사도 벌인다.
하지만 이 같은 거국적인 행사에도 불구하고 콜롬비아인들은 ‘마르케스 부재’의 서운함을 감추지 못한다. 그의 유골을 안장하는 곳이 고국 콜롬비아가 아니라 30년 넘게 정착해 살아온 멕시코이기 때문이다. 그가 조국을 버리고 멕시코를 택한 이유가 있다.
마르케스는 보고타대학 법학과에서 공부한 뒤 1954년 현지 신문 엘 에스펙타도르 기자로 취직했지만 이 신문은 이듬해 독재정권의 탄압으로 폐간되고 말았다. 유럽에서 주로 영화기사를 보냈던 그는 50년대 말 쿠바로 가 피델 카스트로와 친분이 생긴 뒤 쿠바국영통신사의 보고타 지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소설가이자 기자였던 마르케스는 쿠바 혁명 이후 카스트로를 일관되게 지지했고 중남미 독재정권 및 이를 지원하는 미국에 반대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1960년대 초반부터 영화 제작 등을 위해 멕시코 생활을 했던 그는 콜롬비아 군이 그를 좌익 게릴라들과 엮으려는 것을 눈치 채고 1981년 콜롬비아를 저버리고 멕시코시티로 삶의 터전을 완전히 옮겼다. 콜롬비아는 살았을 동안 마르케스를 내쫓아낸 셈이지만 죽고 난 지금에는 멕시코에 묻힐 화장한 유골의 한줌 재만이라도 돌려주기를 원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김현우기자 777hyunwoo@hk.co.kr
김연주 인턴기자(이화여대 영문학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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