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의 선사와 추사 김정희는 정조 연간 병오년(1786년)에 태어난 말띠 동갑이다. 한 사람은 종신토록 깨달음을 추구한 수행자였고, 또 한 사람은 유배지를 떠돌면서도 경세(經世)의 뜻을 꺾지 못한 유생이었다. 그럼에도 서로 절친했다. 두 사람이 똑같이 유난스레 탐닉한 것이 하나 있었다. 늘그막의 추사가 초의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그 탐닉은, 격식 따위는 던져버린 어린 아이의 응석 같은데, 무욕무아(無慾無我)의 경지가 차라리 그것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차(茶)다.
‘…벌써 곡우가 지나고 단오가 가까이 있거늘 두륜산의 한 중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가! 어느 겨를에 햇차를 천리마의 꼬리에 달아서 다다르게 할 것인가. 만약 그대의 게으름 탓이라면, 마조의 고함과 덕산의 방망이로 그 버릇을 응징하리라!’
이 편지는 예순다섯 살에 함경도 북청으로 귀양 갔다가 이 년 만에 풀려난 추사가 초의에게 집에 돌아왔다는 사실을 전하는 내용이다. 그리운 벗에게 추사는 한스러운 세월을 탓하는 대신, 어서 햇차의 맛을 보여 달라고 짓궂게 투정을 부림으로써 자신의 무사함을 알리고 있다. 이 편지를 받은 초의는 서둘러 아궁이에 솥을 걸고 기쁜 마음으로 차를 덖지 않았을까. 우리 선인들의 학문과 예술과 종교, 그윽한 사귐 속엔 늘 그렇게 차가 있었다.
서설이 길었다. 일년 가운데 처음 수확한 찻잎으로 맏물 차를 만드는 때가 곡우(穀雨) 무렵이다. 곡우를 하루 앞둔 19일, 우리 차에 관한 가장 오래된 얘기가 전해 내려오는 하동으로 갔다. 경남 하동군 화개면엔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정한 식품명인이 세 명 있다. 홍소술(83), 박수근(71), 김동곤(66) 선생이다. 각각 전통 수제 녹차, 죽로차, 우전차를 만드는 제다(製茶) 명인이다. 우전차 명인 김동곤 선생은 “아따 고마, 젤 바쁠 때 내려와 갖고…”라고 타박하면서도 기꺼이 가이드 역할을 해 줬다.
“화개 차는 단순한 농산품이라기보다 우리 역사가 담긴 문화입니다. 생산 규모는 전남 보성이나 제주도가 훨씬 크지만, 내력으로 따지자면 지리산 자락에서 나는 차를 넘볼 수 없죠.”
하동녹차는 야생차로 알려져 있다. 사실일까.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칠불사에서부터 화개천을 따라 섬진강까지 오십여 리 이어져 내려오는 산비탈엔 차나무가 잡목처럼 자란다. 한국이 차의 원산지가 아니니 옛날 누군가 이곳에 차를 심었겠지만, 차나무들은 수백 년, 어쩌면 천 년 이상 저절로 교배하고 번식하면서 야생화했다. 근친교배여서 우생학적으로 따지면 그건 열성화에 가깝다. 그래서 하동의 차나무는 수확량이 적다. 찻잎의 색깔도 자색과 푸른색이 뒤섞여 균일하지 못하다. 맛과 향이 강하고 쓴맛도 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이 조선의 차가 지닌 독특한 맛. 반면 일제강점기 이후 대규모로 조성한 보성이나 제주도의 차밭엔 개량종을 심었다. 차에 조예가 깊은 사람은 물을 부어 찻잎이 풀어지는 모습만 봐도 그게 하동녹차인지 아닌지 구별한다고 한다.
“주소지만 여기 옮겨 놓은 집을 빼면 지금 (화개면에) 1,000가구 정도가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 800가구 이상이 하다못해 100평이라도 차밭을 가지고 있어요. 약 300가구 정도는 직접 녹차를 만들 수 있고요.”
산에서 차나무가 저절로 자라기 때문에 대대로 화개에서 살아왔다면, 그래서 선산이 여기 있다면, 그 집엔 당연히 차밭도 있는 것이다. 서너 집 빼곤 그냥 식구끼리 마실 정도만 따서 차를 덖던 게 하동의 차농사다. 하지만 1980년대 녹차 붐이 일면서 규모가 커졌다. 화개천에 바투 붙어 있는 손바닥 만한 다랑이논도 그때 차밭으로 변했다. 20년 가량 차농사는 꽤 괜찮았다. 하지만 2006년 중국산 차에서 농약 성분이 발견되고부터 차 소비량은 급감하기 시작했다. 때마침 커피 붐도 시작됐다. 수매한 차를 보관하는 농협 창고에서 벚나무길 따라 신라 흥덕왕 때 진감선사가 처음 차를 심었다는 차시배지까지 십리 남짓한 길, 목 좋은 곳에 커피전문점이 세 개 들어서 있었다.
“논일만 해서는 기곗삯도 안 나온께 이리 오제. 글쎄, 한 이십년 됐나…이 아짐은 이제 오줌 누면서도 딸 걸? 흐흐.” “아따, 이 아지매가 머라 캐샀노? 아지매가 더 잘 따맨시로.”
차나무는 상록수여서 사철 잎을 딸 수 있지만 한국에선 옛날부터 봄에만 찻잎을 수확했다. 양력으로 4월 중순부터 약 한 달. 화개면 주민만으로는 일손이 달리기 때문에 이웃 구례에서 손을 빌려온다. 시배지 부근 차밭에서 일하던 김점례(70) 할머니는 구례군 용방면에서 오전 여섯시 반 봉고를 탔다고 했다. 일당 5만원. ‘아랫마을 하동사람 윗마을 구례사람’이 어우러지는 화개장터는 이제 외지인만 들끓는 관광지가 돼버렸다. 그래서 경상도와 전라도의 사투리가 섞이는 풍경은 조영남의 노랫말에만 남은 줄 알았었는데 차밭에서 그 반가운 뒤섞임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오전 7시부터 해질 때까지 따 모으는 찻잎은 많아야 2㎏이고 찻잎 1㎏에서 얻을 수 있는 차는 약 200g이다.
“화개엔 이런 속담이 있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가치 없는 세 가지가 뭔고 하니, 서른 지난 노처녀, 겨울 지난 무, 그리고 설 지난 차.”
우전차에 대해 설명해주기 전 김 선생은 그렇게 운을 뗐다. 우전(雨前)은 곡우 전에 딴 여린 잎으로 덖은 차다. 새싹으로만 만든 것이기 때문에 양이 적고 값이 비싸다. 생산량으로 따지면 전체 찻잎의 10% 남짓. 초의가 지은 다신전에는 ‘찻잎을 따는 시기는 곡우 전 5일이 으뜸이고, 그 후 5일이 다음이며, 다시 그 다음 5일이 좋다’고 돼 있다. 차나무는 동백나무과에 속한다. 잎도 동백과 비슷하게 생겼다. 가장 어린, 속에 바늘처럼 말려 있는 잎을 창(槍)이라고 하고 그것을 깃발처럼 감싸고 있는 잎을 기(旗)라고 부른다. 창 하나에 기 하나만 붙은 일창일기(一槍一旗), 혹은 기가 두 개 붙은 일창이기(一槍二旗)의 작고 보드라운 잎만 따서 덖는 게 우전차. 옛날 임금에게 진상하던 귀한 차다.
쌍계사는 다인(茶人)들 사이에서 성지로 여겨지는 곳이다. 절집 담장을 둘러싼 깊은 대나무숲 속으로 대바람 소리를 듣고 자라는 차밭이 있다. 굳이 손질도, 수확도 하지 않는 오래된 곳이라 차밭이라기보다 차나무 군락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대나무는 비를 막아주고 그늘을 만들어주고 밤새 이슬을 머금고 있다가 차나무에 보시한다. 그렇게 대나무 이슬을 받고 자란 차가 바로 죽로차(竹露茶). 우전차와 함께 고급차의 대명사로 인식되는 것이다. 사실 우전이니 죽로니 제다법은 다를 게 없다. 따서 수분이 채 마르기 전 덖고 비비기를 반복하면 된다.
그러니 그러한 구분은 기실 이런 의미일 게다. 닷새 단위로 계절의 깊이를 달리 느낄 만큼 본디 우리의 심미안이 남달랐으며, 차 한 잔에 무생사(無生死)의 이치를 깨칠 만큼 우리의 정신이 차가웠으며, 찻잎 한 장에서 참새의 혓바닥(雀舌)과 이슬의 보시를 발견할 만큼 시심이 깊었다고. 인스턴트와 스마트와 스피드에 물든 오늘의 한국인들은, 그래서 억지로라도 차향이 우러나오는 연둣빛 백자 잔 앞에 앉아볼 필요가 있을 듯. 초의 선사의 할(轄ㆍ깨달음을 주기 위해 지르는 고함)이다. ‘차의 티끌 없는 정기를 다 마시고, 어찌 대도를 이룰 날이 멀다고 하겠는가!’
하동=글ㆍ사진 유상호기자 shy@hk.co.kr
[여행수첩]
●하동군은 화개면 일대의 차밭 중 경치가 빼어난 8곳을 ‘하동 다원 8선’으로 선정했다. 운수리 차시배지는 신라 때 당나라 사신으로 다녀온 대렴공이 처음 차를 심었다고 전해지는 곳. 정금리 도심다원에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차나무가 있다. 범왕리 명원다원에는 탐방 데크가 설치돼 있다. ●쌍계사 입구에 하동차전시관이 있다. 녹차에 관한 여러 가지 학습ㆍ체험이 가능하다. 쌍계사에선 5월 2일 진감선사에서 초의선사로 이어지는 차의 법맥을 기리는 ‘다맥전수 대법회 및 108헌다례’가 열린다. ●제19회 하동 야생차 문화축제가 5월 16일부터 3일 간 화개면에서 개최된다. 녹차 제조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하동군 관광안내콜센터 1588-3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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