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우리, 그러면 안 되는 거다
김신아
아트 프로듀서
베레모 아래 늘어뜨린 머리카락 새로 담배 연기를 뿜어내면 멋져 보이리라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샤넬 No. 5를 잠옷이라 했던 배우는 비운에 갔지만 화장대위 그녀의 잠옷은 다른 녀석들과 나란히 서 격이 다른 향이라 뽐내는데, 그러고 보니 내 방 한쪽에는 ‘작은 프랑스’가 있다.
파리 초행길, 맞은편에서 키 큰 흑인이 걸어온다. 제법 도시적인 차림의 깔끔한 남성인데 하필 해 질 녘 인적 드문 골목이다. 행여 그의 관심을 끌까 무서워 숨도 참으며 길 끝으로 바싹 비켜선다. 그저 제 갈 길을 가고 있었을 뿐인데, 그의 피부색이 밝았대도 이와 똑같이 반응했을까? 불과 나흘 전 엑상프로방스에서 아비뇽행 기차를 놓친 나를 위해 역 밖으로 따라 나와 택시를 잡아준 것도 키 큰 흑인이었는데 내 편견은 이렇게 무의식 속까지 뿌리가 깊었다.
축제는 종종 몇 개 공연을 한 무대에 섞어놓는다. 그날도 아프리카와 유럽을 동시에 보는 날이었는데 극장에서 계속 볼멘소리가 들려온다. 할 수 없이 조금 일찍 도착해보니 부르키나파소 무용단 대표가 함께 공연하는 “프랑스 무용단에 축제 무대 팀이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한다”며 항의를 해온다. 순간 “프랑스 팀이 워낙 예민했다”고 말하는 우리 스태프들에게 화가 치민다. 그리고 지금도 프랑스의 적선에 의지해 살아야 하는 부르키나파소 흑인의 불어는 내용에 상관없이 아프게 서럽다.
그래서 “아니”라고 “우리는 초청한 모든 예술가를 똑같이 존중한다”며 설득해 무대로 돌려보내고 공연 후 그들의 테이블로 먼저 가 “축제를 빛내줘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프랑스 안무가도 다가와 “무대에서 까다롭게 해 미안하다”고 사과한다. 그런데 정말 똑같이 존중했느냐고 묻는다면 “아니”라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비슷한 규모와 수준의 오히려 좀 더 긴 아프리카 공연보다 높은 공연료를 프랑스 작품에 주었으니까. 어쩌면 “들어본 사람도 많지 않을 아프리카 가난한 나라에서 온 ‘무용수’와 누구나 동경하는 명품의 나라 프랑스에서 온 ‘예술가’를 똑같이 취급할 수 없지 않으냐”고 편들어 줄지도 모르겠다. 국제행사에 관여해본 사람 치고 유럽과 북미보다 아시아나 아프리카 예술가에게 더 많은 돈을 줘본 사람은 없을 테니까. 그러나 한국 공연단이 유럽에 가 받는 공연료를 생각해보자. 우리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그럴싸해 보이지만 절대 결론 낼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아시아 정체성’을 주제로 여러 나라 기자들을 불러 포럼을 열었다. 그들 눈에 보이는 아시아를 솎아내 향후 문화 국제교류에 적용하면 좋겠다는 기대도 있었다. 그런데 서양인들은 본인들과 다른 뭔가가 있어 보여 매력적인 추상적 아시아를 얘기했고, 아시아인들은 다양한 색의 ‘아시아를 단어 하나에 묶어 정의 내리겠다’는 발상의 오만함을 지적한다. 맞다, 유학 다녀왔다고 미국인이 되는 것도, 동경하던 명품 사들인다고 유럽인이 존경하는 눈길로 봐주는 것도 아닌데 하마터면 파란 렌즈로 세상을 볼 뻔했다.
“파리 사무실에서는 프랑스인이, 뉴욕 사무실에서는 미국인이 나를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내가 세상 누구보다 낫거나 우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캐나다는 프랑스 식민지였고, 영국 식민지였으며 미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우리는 타 문화에 항상 마음을 열고 다가갑니다. 상대가 누구건, 어떤 일을 하건 절대 “내가 더 잘 안다”고 하지 않았던 것이 성공의 열쇠였습니다.” 박물관 컨설팅으로 국제적 기업을 일군 게일 로드의 인터뷰로 단순한 동작이 지루하게 반복되던 아랍 민속공연에도, 36음계를 넘나들던 인도 음악에도 역사와 사연이 담겼었다는 것을 기억에서 끄집어낸다.
공항에 도착하면 인도 출신 택시운전사의 인사로 처음 영국을 만난다. 우리가 기피하는 험하고 천한 노동은 동남아 혹은 가난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 차지다. 그리고 오직 하루, 한껏 멋 내고 거리로 나선 그들과 스치며 가방을 여미던 나는 매우 경박하고 추한 한국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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