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발달장애인법, 국격(國格)의 문제다

입력
2014.04.16 20:00
0 0

유럽이나 미국인들의 모럴이 우리보다 낫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다. 저쪽에 젠틀맨십(gentlemanshipㆍ신사도)이 있다면 우리에겐 예의염치(禮義廉恥)가 있다. 인권이나 자유와 관련된 행동양식이나 사회시스템은 적잖이 다르지만, 대개 의식이 행동으로 발현되는 양상이 다른 것이지 양심의 우열은 아니라고 여겼다. ‘의식이 족해야 예의를 차린다’는 말처럼, 생활형편이 나아지면 우리도 더 좋아질 것이라고 애써 자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안간힘조차 무색할 때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서구인들의 사회적 약자, 특히 장애인에 대한 ‘뭔가 다른’ 선의와 배려를 느낄 때다. 국민소득만으로 잴 수 없는 국격(國格) 같은 걸 생각하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런 때다.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은 매우 활달한 외교관이었다. 북미국장으로서 외교적으로 우리에겐 영원한 ‘갑’인 미국을 상대하면서도 치고 받고, 어르고 달래면서 1990년대 중반의 ‘4자회담’ 국면을 무난히 이끌어 냈다. 늘 여유가 넘쳤던 그가 사석에서 뜻밖에 심각한 표정이 됐다. 빌 클린턴 행정부의 적극적 대북 개입정책(engagement policy)에 따라 미국은 북한 식량지원을 대폭 늘리려 하고, 우리는 남북관계의 주도권 등을 감안해 지원 시기와 물량의 ‘적절한 조절’을 꾀하던 국면이었다.

“주한 미대사관의 ○○○ 참사관 대하기가 가장 힘들어. 국무장관은 오히려 쉬운데 말이오. 그 친구한테 북한 식량지원 좀 조절하잔 얘길 하면, 그저 물끄러미 날 바라보는 거야. 마치 사람이 굶어 죽어 나가는 마당에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듯이…. 그 친구 부부가 우리 뇌성마비 어린이 입양해서 업어주고 씻어주고 하면서 그렇게 정성스럽게 보살피고 있거든. 우린 그렇게 못하잖소. 그 선량한 눈을 보면 왠지 내가 인간적으로 한 수 접히는 느낌, 우리의 정책 윤리가 미국보다 떨어지는 것 같은 생각까지 들 정도요.”

유 전 장관은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 친구 부부의 선의도 선의지만, 정작 미국이 대단한 건 그런 선의가 잘 작동할 수 있도록 제도가 갖춰졌다는 거요. 장애가족 지원비, 재활 및 간호 프로그램 지원 같은 게 탄탄해. 우리도 이제 그런 제도를 하루빨리 정비해야 할 거요.”

그 얘기를 들은 지 20년이 지났다. 그 사이 우리는 세계 최대의 스마트폰 생산국이 됐고 유수의 자동차 강국이 됐다. 하지만 장애인 지원제도는 그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후진국이다. 서울 여의도에서는 오늘도 발달장애인 부모와 환자들의 천막농성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주 만개한 벚꽃 잎이 눈처럼 흩날리던 그 곳에선 발달장애인과 가족 8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장애인 어머니 등 78명이 눈물을 흩뿌리며 삭발을 감행했다. 발의는 됐지만 2년째 국회 처리가 미뤄지고 있는 발달장애인법 제정을 촉구하는 처절한 절규다.

발달장애인은 자폐증, 뇌성마비(간질), 다운증후군 등으로 정상적 사회생활이 어려운 환자들이다. 특정 신체장애와 달리, 밥 먹고 용변 보는 것까지 보호자들이 24시간 챙겨줘야 하기 때문에 환자 본인뿐 아니라, 온 가족이 극심한 부담과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다. 지난해 말 40대 가장이 자폐성 장애 1급이던 열일곱 아들과 함께 동반 자살한 걸 비롯해, 알려진 것만 작년 4건, 올 들어 2건의 가족 동반 자살사건이 발생했을 정도다.

발달장애인법은 장애인 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장애 상황에 빠진 20만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들에게 최소한의 희망을 주자는 법이다. 발달장애의 특수성을 감안한 지원센터 설치, 발달장애인의 일자리 확충과 최소한의 소득보장, 부모 사후 홀로 된 성년 장애인에 대한 후견 시스템 마련 등이 골자다.

정부와 정치권 일각에선 적잖은 예산과 다른 장애인 처우와의 형평성 등을 들며 4월 국회 처리에 미온적이라지만 온당치 않다. 더 이상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고군분투하는 발달장애인과 가족을 외면한다는 건 몰염치다. 소득보장책을 포함해 최선의 법안을 마련해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처리하기 바란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사회적 부조이자, 국격의 문제다.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