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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로 싹둑 자른 외관… 앗아간 반쪽의 아픔을 기억하는 듯

입력
2014.04.15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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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집에살다5.부산 월내리 반쪽집/반쪽집 정면/2014-04-15(한국일보)
작은집에살다5.부산 월내리 반쪽집/반쪽집 정면/2014-04-15(한국일보)

도로확충으로 보금자리 잘려나가 '머물기 위한 집'으로 맞춤 설계

손실된 공간 2층으로 보완하고 공간 구분 없애 협소함의 단점 최소화

1·2층엔 큰 창으로 바다 조망주차장엔 얇은 두께의 구조물 세워

터전 박탈 당할 뻔한 비판 목소리 담고뒤틀린 듯한 층 배열로 지루함 없애

부산 시내에서 차로 1시간 가량 떨어진 기장군의 한 바닷가 마을. 그 흔한 횟집 하나 없이 관광철에도 한적하기만 한 이 곳에 도로 확장이 결정된 것은 2년 전이다. 2차로 도로의 폭을 늘리고 양 가장자리에 인도를 설치하는 간단한 작업이었지만, 도로에 면한 집에 살던 이들에게는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근처 월내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B씨는 집과 땅이 하루아침에 반으로 잘려나가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보상금이 나왔지만 집을 사거나 새로 짓기엔 어림 없는 액수였다.

무엇보다 그는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남편의 직장을 따라 경남 김해에서 이주해 이곳에 정착한 게 1984년이다. 3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남편이 곁을 떠나고 자식들도 출가했지만 몸과 마음은 이미 마을에 뿌리 박힌 뒤였다. 매일 오르내리던 비탈길, 볼품 없이 자란 집 뒤의 소나무, 무덤덤한 바다까지 눈에 박히지 않은 것이 없었다. 도로에 면한 다른 집들이 하나 둘 철거할 때 B씨는 반쪽이 난 터에 새로 집을 짓기로 했다. 93㎡(28평)짜리 작은 땅 위에 지어진 '반쪽집'이다.

반쪽 난 터에 새로 지은 집

작은집에살다5.부산 월내리 반쪽집/반쪽집 측면/2014-04-15(한국일보)
작은집에살다5.부산 월내리 반쪽집/반쪽집 측면/2014-04-15(한국일보)

오신욱 라움 건축사사무소 소장이 B씨와 인연이 닿은 것은 건설업체를 통해서였다. 부산에서 태어나 학교를 나오고 건축 을 시작한 오 소장은 자신이 속한 지역의 정체성을 건축으로 규명하는 데 많은 관심을 쏟아왔다. 부산이라는 도시에 어울리는, 또는 필요한 건축이 무엇인가 고민하던 차에 마침 그의 다른 건물을 시공 중인 건설회사 사장이 B씨의 사정을 전해왔다. B씨는 새 집을 짓기로 결심했으나 자금 사정 때문에 이미 여러 업체로부터 거절 당한 후였다. 오 소장은 건축비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말에, 집의 설계를 전폭적으로 건축가에게 맡긴다는 조건으로 설계비를 거의 받지 않고 이 일에 뛰어들었다.

평생 남의 집에서 살던 사람이 자기 집을 짓는 경우 열에 아홉은 극도로 예민해지게 마련이다. 자신의 생활 패턴과 미감, 가치관이 총체적으로 녹아난 집을 구현하려는 욕심이 신경을 곤두서게 만들기 때문이다. 건축가 쪽에서도 일반 건물을 지을 때와 달리 건축주가 왜 집을 짓고 싶어하는지, 이 공간에서 어떤 생활을 할지에 대해 면밀하게 조사한 뒤 일에 착수한다. 그러나 반쪽집은 상황이 좀 달랐다. B씨가 원하는 것은 '나만의 집'이 아니라 단지 이 마을에 계속 머물 수 있는 집이었다. 실제로 그가 건축가에게 요구한 것도 "1층에 방이 하나 있으면 좋겠다"가 전부였다. 반쪽 난 집에서도 이전의 생활을 무리 없이 영위하는 것, 그 외 나머지는 건축가의 몫으로 떨어졌다.

가장 급한 일은 반쪽 난 면적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오 소장은 2층으로 집을 올리기로 했다. 혼자 사는 집이라 큰 공간은 필요 없지만 주어진 면적을 다 써도 1층집으로는 40㎡(약 12평) 밖에 안돼 종종 놀러 오는 딸들과 사위, 손주들을 맞기엔 비좁았다.

원래 B씨가 살던 집은 단층에 지면 높이도 도로보다 낮아, 도로에서 보면 지붕만 빼꼼하게 보였었다. 위치도 도로에서 겨우 1m 가량 떨어져 있어 운전자가 자칫 실수라도 하면 차가 집을 덮칠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반대편으로는 좁은 골목을 사이에 두고 다른 집들과 붙어있다시피 해 바다를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도 B씨는 정작 집에서 바다를 본 적이 없다.

작은집에살다5.부산 월내리 반쪽집/1층 거실창으로 보이는 바다/2014-04-15(한국일보)
작은집에살다5.부산 월내리 반쪽집/1층 거실창으로 보이는 바다/2014-04-15(한국일보)

오 소장은 지면을 도로와 동일한 높이로 돋운 뒤 그 위에 2층으로 집을 올려 손실된 면적을 보완하고 전망을 확보했다. 1층 거실에 큰 창을, 2층에는 아예 전면으로 창을 내 바다를 아낌없이 담았다. 2층 전면창을 열고 나가 베란다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하늘은 반쪽집의 전망 중 압권이다.

공간도 시원하게 텄다. 원래 집에는 방이 세 개나 있어 실질적으로 몸을 누이는 곳 외에 다른 방들은 호박이나 고추를 말릴 때만 들어가는 정도였다. B씨의 바람대로 1층에 잠자는 방을 하나 만든 것 외에는 공간을 구분하지 않아 좁다는 느낌을 받지 않게 했다. 2층은 작은 면적에도 불구하고 탁 트인 구조와 집주인의 단출한 세간 덕에 여남은 명이 둘러 앉아도 될 만큼 넉넉하다. 평소엔 B씨가 안마의자에 앉아 쉬거나 TV를 보고, 딸 가족이 놀러 올 때면 숙소로 변신한다.

시위하는 집 "이 땅이 잘렸습니다!"

반쪽집의 정수는 외부다. '설계를 건축가에게 맡긴다'는 조건의 결과를 확인할 수 있는 곳도 내부가 아닌 외부다. 도로 쪽에서 바라본 반쪽집은 압도적으로 시선을 잡아 끈다. 노후한 집들 사이에 새하얀 집이 우뚝 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평평하게 만든 정면이 아마 그 주범일 것이다.

반쪽집의 정면은 건물의 표면이라기 보다는 단면에 가깝다. 원래 있던 건물을 칼로 썩둑 자른 것처럼 보이는 이 선은, 이쯤 되면 몇몇은 눈치를 챘듯 도로 확장으로 인해 새로 설정된 대지의 선과 동일하다. 건축가는 대지의 선과 수평이 되도록 정면을 설계한 뒤, 이 선을 집 옆에 붙은 주차장의 구조물로까지 확장시켰다. 이로써 땅이 어디까지, 어떤 형태로 잘려나갔는지가 명명백백해졌다.

반쪽집이 자신의 온 몸을 던져 외치는 것은 바로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 하마터면 삶의 터전을 박탈당할 뻔했던 누군가의 사연이다. 날 선 비판의 목소리가 건축으로 구현되는 흥미로운 지점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주차장 구조물의 두께는 매우 얇아 입체이면서도 선으로 보이는 착시를 일으킨다. 모서리는 손가락을 대면 찔릴 것처럼 날카롭고, 창백한 백색은 퍼런 서슬을 연상케 한다.

집이 폭력의 기억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반쪽집을 위에서 보면 두 개의 직사각형이 서로 각도를 달리해 맞물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한 사각형이 대지의 선을 따라간다면 다른 사각형은 집 뒤 골목길의 선을 따랐다. 사람 한 두 명이 지나갈 수 있는 이 좁은 골목은 의도적으로 조성한 게 아니라 집과 상점이 들어서는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다. 오 소장은 이 골목을 "이 동네에서 기억돼야 할 요소들 중 하나"라고 했다. 먼 훗날 동네가 재개발돼 지금의 모습을 완전히 잃더라도 오래된 골목의 기억은 반쪽집의 한 면에서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두 개의 뒤틀린 정육면체가 맞물려 만들어진 집은 정면, 측면, 배면의 모양이 모두 달라 지루하지 않다. 입체의 뒤틀림은 새하얗게 칠해진 벽면 덕에 한층 더 부각돼 보인다.

"부산에 어울리는 건축물의 색과 재료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해왔습니다. 이 동네가 햇살이 강하고 바닷물이 유독 새파란데 거기에는 흰색이 가장 잘 어울릴 거라고 판단했어요. 흰색 중에서도 펄이 약간 들어간 것을 골라 햇볕이 강하게 비치는 날엔 집의 표면이 미세하게 반짝입니다."

며칠 전 팔을 다쳤다는 B씨는 집에서 쉬는 중이었다. 곧 장사도 그만둘 것이라는 그에게 다른 곳으로 이사할 생각은 없었느냐고 물었다. 수십 년간 교류한 이웃들도 다 떠나는 마당에 고향도 아닌 이곳에 계속 머무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살가우면서도 말수가 적은 B씨는 한 마디만 반복했다. "제가 어딜 가겠습니꺼."

사람과 집, 건축주와 건축가의 소통은 종종 어긋난다

건축주와 건축가의 갭

반쪽집을 보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간 4월 초순. 서면역에서 기장군으로 가는 길에 집을 설계한 오신욱 소장이 "집이 평소와는 좀 다른 상태"라고 말하며 계면쩍은 듯 웃었다. 집에 도착하니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건축가가 주차장 용도로 만든 공간에 간이 창고가 들어서 있었던 것. 그것도 공간에 짜맞추다시피 꽉 들어차서 주차장 구조물을 비롯한 집의 미학적 요소들이 전부 가려진 상태였다.

"건축주 분께서 장사를 하시다 보니 물건을 저장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셨나 봅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창고를 들여놓으셨더라구요."

사정을 듣고 보니 이해는 됐지만 어쩐지 허망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건축물의 아름다움을 보존하기 위해 집주인이 편의를 포기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구조물의 독특한 형태와 그에 담긴 시위의 정신이 집주인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는 뜻 아닌가. 오 소장은 "허가 없이 가설 건물을 짓는 것이 불법이라 건축주께 그렇게 말씀 드렸고 결국 창고를 철거하기로 했다"며 "저장 공간은 지하실을 이용해 따로 만들어드릴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돌아오는 길은 건축주와 건축물의 조화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완공 이후 많은 이들이 반쪽집을 보기 위해 찾아왔고 그 중에는 집을 사들여 카페나 멋들어진 문화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는 이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건축주에게 좀 더 어울리는 집이었으면 좋지 않았을까요? 반쪽집은 그 분이 이해할 수 있는 미감을 벗어난 것 같은데요." 건축가가 욕심을 부린 것 아니냐는 말을 에둘러서 하는 기자에게 오 소장은 "집은 의식 있는 사람만 갖는 것이 아니다"라고 답했다. "집주인과 집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에는 저도 공감합니다. 하지만 다양한 건축을 경험하지 않았다고 해서 평생 똑 같은 집에서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어요. 건축주가 반쪽집에 살면서 이제까지 겪어보지 않았던 공간감이나 미감 같은 것들을 체득하셨으면 했습니다."

집이 지어진 후 딸 가족이 왕래하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고 하니 B씨와 반쪽집 간의 소통 또는 주고받음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겠다. 반쪽집에 들어선 창고는 건축가와 건축주의 의식 차가 예상치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단적인 사례로 기억될 듯 하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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