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토니 벤(Toni Benn) 영국 좌파 정치의 상징
"If you can find money to kill people… you can find money to help them"
-1989년 5월 영국 '채널4'생방송에서
● 작위 세습 포기한 첫 하원의원
1925년 런던 정치명문가서 출생
25세 때 최연소 의원으로 정계에
18선하며 사회주의 가치 지켜
● '벤주의자' 리더로 우뚝
노조중심 지역당을 우위에 두는
노동당 민주화 운동으로 입지 다져
4개 부처 장관으로 복지 실험도
● 신자유주의에 외롭게 맞서다
원유 파동 등 '영국병' 먹구름에
1979년 총선서 패한 노동당
"黨 우경화가 패인" 강력 비판
● 최고의 정치 영웅
2001년 정계 은퇴 후
반전·인권 투쟁 현장서 더 큰 활약
BBC 조사서 대처 제치고 뽑혀
연재를 시작하며…
세상을 뜬 이들을 추억하려고 한다. 동시대를 살아 든든했고 또 내내 고마울 이들을 기억하자는 취지다. 가급적 최근에 떠난 이들을 주목할 생각이다. 문패는 김완수 시인의 시 '들꽃'에서 얻어왔다. "꽃을 꺾어내면/ 들 한 쪽이 가만히 빈다/ 아무도 모르게 저를 키워와선 이렇게 꺾인다/ 어쨌든 이렇게 꺾어지고 나면/ 애초에 없던 약속마저 애처롭다"(전문) 그렇게 빈 자리에 또 아름다운 것들이 '가만히' 자리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1. 토니 벤(Toni Benn)- 영국 좌파 정치의 상징
20세기 영국 좌파 정치의 구심이자 상징이던 토니 벤(Toni Benn)이 3월 14일 숨졌다. 향년88세.
고인은 영국 노동당 소속 하원의원(18선ㆍ51년 재직)과 4개 부처 장관을 지냈고, 60년대 영국의 야심찬 복지국가 실험을 주도했다. 정치가로서 또 민주주의 교사로서 스스로 지운 소명에 충실하고자 노력했고, 은퇴 후에는 인권과 반전 평화운동에 헌신했다. 그는 당대의 가장 단단한 사회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으나, 그의 사회주의는 책이 아니라 상식과 윤리, 그리고 정의감에서 배어 나온 것이었다.
한국에서 그를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그는 총리나 당수를 지낸 적도, 각료로서 국제 무대에서 활약한 적도 없다. 다만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영화 식코(2007)에 나온 그를 기억하는 이는 더러 있을지 모른다. 미국의 황폐한 의료시스템을 고발한 영화에서 벤은 노동당 애틀리 정부(1945~50) 시절 나이 베반(당시 보건부장관)과 함께 추진했던 영국 국가의료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의 취지를 소개하며 "민주주의야말로 가장 혁명적인 것"이라는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권력자가) 국민을 통제하는 두 가지 수단이 있습니다. 두려움과 절망입니다. 교육받고 건강하고 자신감이 넘치는 국민은 통제하기 어렵죠.(…) '저 사람들은 배워서도 안 되고 건강해도 안 되고 의욕에 넘쳐서도 안 된다.' 인류의 상위 1%가 80%의 부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노릇은 사람들이 그걸 참는다는 겁니다. 그들은 가난하고, 주눅들고, 겁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시키는 대로 일하며 소박한 꿈이나 꾸고 사는 것이 최선이라고 믿고 살아갑니다."
그는 1925년 4월 3일 런던의 한 정치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조부와 외조부, 부친(William Wedgewood Benn)은 모두 자유당 하원의원이었다. 부친은 유별난 이였던 듯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윌리엄은 군 면제 대상이던 37세의 각료 의원 신분으로 참전, 정부의 내각 복귀 권유를 두 차례나 뿌리치면서 종전 때까지 복무했다. 자유당 내 급진파였던 그는 27년 노동당으로 당적을 옮기면서 의원직을 사임한다. "자유당으로 선출된 만큼 당적을 옮기면서 의원직을 유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고, 아들 벤은 훗날 자신의 일기에 썼다. 윌리엄은 이듬해 보궐선거로 하원에 복귀했다.
벤의 어머니 역시 여성 사제서품을 거부하던 영국국교회를 등지고 조합교회주의자로 개종할 정도로 진취적인 페미니스트였다. 어머니는 매일 밤 침대 머리맡에 앉아 구약의 왕들에 맞서 싸운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고 한다.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원칙에 대한 벤의 고집과 헌신은 유전된 기질과 기독교사회주의적 훈육에 뿌리내린 거였다. 1945년, 20살의 그는 선친과 형(전사)이 복무했던 영국 공군(RAF)에 입대, 2차대전 종전 때까지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복무했다.
1950년 벤은 하원(서민원)의원에 당선, 25세 최연소 의원으로 웨스터민스터에 입성한다. 이후 2001년 은퇴할 때까지 그는 당과 동료들이 좌파에서 중도, 중도에서 우파로 변신하는 동안 중도에서 연성 좌파(soft left)로, 또 강성 좌파로 나아간 드문 정치인이었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광풍이 허물어가던 사회주의적 가치들을 안간힘으로, 하지만 품위 있게 지탱한 드문 사회주의자였다.
1960년 벤은 자신의 정치 이력에서 꽤 돋보이는 선택을 한다. 그 해 그는 선친이 작고하면서 2차 대전 중 받은 귀족(자작) 작위를 세습해 상원(귀족원)으로 옮겨야 할 운명을 맞이했다. 하지만 그는 작위 세습 거부권을 얻기 위해 법적 투쟁을 전개, 3년 뒤 승리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그 어떤 세습 작위보다 빛나는 정치적 자산을 챙긴다. 이후, 그의 이력에는 작위를 포기한 영국 최초 하원의원이라는 설명이 늘 따라 다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저 선택이 정치적 계산에 따른 것은 아닌 듯하다. 훗날 인터뷰에서 그는 "상원은 은퇴한 정치 퇴물들의 외몽골 의회(변방) 같은 곳 "이라고 말했다. 신분 세습 전통을 경멸했던 이 혁신적 정치인은 윌슨 노동당 정부(1964-70)의 체신부 장관이 돼 우표에서나마 여왕을 내쫓으려 한 적도 있다.
그가 좌파 아이덴티티를 확고히 한 것은 70년대, 특히 74~79년 노동당 집권기부터다. 당 대변인과 산업부장관 등을 거치면서 그는 노동자와 노동조합을 더 잘 알게 됐다고 한다. 일기에서 그는 76년 크리스마스에 아내가 을 선물하기 전까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기본 저작조차 읽은 게 없었노라고 수줍게 고백했다. 사실 그는 독서 자체에 별 취미가 없었고, 귀족이라면 연상되는 음악 미술 연극 등 '교양'도 부실했던 듯하다. 유년을 기록한 일기의 한 챕터는 아예 제목이 '나는 어쩌다 속물이 되었나(How I Became a Philistine)'다. 그의 유년 런던 집은 테이트모던 미술관 바로 옆이었지만 단 한 번도 간 적이 없었고, 연극도 한두 번 본 기억밖에 없고, 이나 디킨스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다고, 그는 1999년 일기에 적었다. "나는 대화의 전통(oral tradition) 속에서 자랐다. 독서보다는 듣기, 쓰기보다는 말하기로 학습했다." 벤은 빼어난 웅변가였고, 그의 화법과 연설은 다른 정치인에 비해 덜 화려했을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그래서 노동 계급 대중들과 더 잘 소통할 수 있었다고, 가디언(3.22, Peter Wilby)은 썼다.
사회주의자 벤은 당내 좌파의 전위이자 당원과 노조 중심의 지역당을 우위에 두는 당 민주화 운동의 구심으로 정치적 입지를 다졌고, '벤주의자(Bennite)'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정파의 리더가 된다.
하지만 그의 기반은 의회 안보다 바깥, 지역당과 당원 사이에서 두터웠다. 그리고 그의 70년대는 노동당이 나락으로 추락하던 때, '영국병'이라 불리게 될 먹구름이 국가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하던 때였다. 원유파동과 국제수지 악화, 임금ㆍ물가 상승, 파운드화 가치 폭락, 한계에 이른 국유기업의 방만 경영…. 74년 윌슨 정부는 유럽 단일 시장(EC) 잔류 여부를 두고 내분사태에 돌입했고, 75년 영국 역사상 최초의 국민투표(Referendum)를 벌인다. 결과는 지속가입 지지(67.2%). '반 유럽' 블록의 선봉에 섰던 좌파진영의 당내 위상은 급락했고, '공적 1호'로 몰린 벤은 산업부장관에서 에너지부장관으로 좌천당한다. 그 해 2월 마가렛 대처는 보수당 당수가 되고, 4년 뒤 집권한다. 대처의 12년 장기집권을 포함한 보수당 정권 18년 동안, 벤과 그의 진영은 주요 정책 결정과정에서 철저히 소외된다.(고세훈 참조.)
대처에 패배한 총선(79년 5월) 이듬해인 1980년 벤은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과의 인터뷰에서 당의 시장자유주의적 노선 선회를 비판하며 "(노동당의 패배는) 패배가 아니라 투항"이라고 말했다. 그는 70년대 들어 노골화한 당의 우경화가 총선 패배를 낳았다고, 당이 시장과 보수당에 투항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자본주의를 유지 관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사회를 바꾸고 더 나은 가치를 정의하기 위해 여기 있는 것이다."
그의 말처럼, 좌파의 외로운 저항에도 불구하고, 중도ㆍ우파 중심의 노동당은 총선 전후 우경화 행보를 더 서둘렀다. 76년 캘러헌의 노동당은 국가의 시장 개입 원칙인 케인즈주의의 포기를 선언했고, 노조나 지역당과 더 거리를 두고자 했다. "노동당 지도부는 완전히 타락했으며 좌파의 성장은 당 바깥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노동당의 죽음을 뜻한다."(78년 1월 15일 일기)
94년 당수가 된 토니 블레어는 당이 80년간 상징적으로나마 유지하던 당 강령 4조(사회주의조항-생산 분배 교환수단의 공공소유)를 공식 폐기, '제3의 길'이라는 모호한 깃발을 든다. 그는 3년 뒤인 97년 집권에 성공한다.
벤은 수 차례 당권 선거에 출마해 고배를 마셨다. 노동당의 견제에서도 자유로워진 대처의 신자유주의는 국영기업 민영화와 집요한 반노조 정책으로 벤의 전통적 지지기반을, 사회주의적 가치를 급속히 와해시켜 나갔다.
2001년 벤은 "정치에 헌신할 더 많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정계 은퇴를 선언한다. 마지막 하원 연설에서 그는 생애 동안 다듬어온, 권력자에게 해야 할 질문 5가지를 언급했다. "당신은 어떤 권력을 지녔는가, 당신의 권력은 어디서 나오는가, 당신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가, 당신은 누구에게 책임을 지는가, 당신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당신이 당신의 지배자를 제거할 수 없다면 당신은 민주?체제에서 사는 것이 아니다."
세속적으로 보자면, 그의 정치 인생이 성공적이었다 하기 힘들지 모른다. 그는 당수나 부당수 선거에서 매번 패했고, 각료로서도 산업부장관 1년이 가장 그럴싸한 자리였다. 보수 언론은 그를 '정신 나간 좌파(loony left)'로 치부했고, 당 안에서도 그의 말년은 외로웠다.
하지만 그는 은퇴 후 시민과 노동자들 사이에서, 반전 인권투쟁의 현장에서, 자신과의 약속대로 더 큰 정치인으로 활약했다. 영국 시민들은 2006년 '생존한 최고의 정치 영웅'을 묻는 BBC 설문조사(2만610명 응답)에서 대처(35.31%)가 아닌 벤(38.22%)을 꼽았다. 신자유주의의 병폐들- 민영화, 규제완화, 감세 등에 따른 복지의 질 저하, 양극화, 실업 노숙 범죄율 증가-이 영국 사회를 휩쓸고 있던 때였다. 그 해 1월 BBC와의 축하 인터뷰에서 벤은 "당혹스럽고 고맙다. 하지만 나는 영웅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가 믿은 것은, 시민과 노동자 그리고 민주주의였다. 그는 파이프 애연가였고 머그잔으로 매시간 500ml의 차를 마셨다. 술은 입에 대지 않았고 80년 이후 채식주의자로 살았다.
수많은 정치인과 시민들이 지금도, 그를 애도하고 있다. 어떤 시민은 그의 낡은 벤치를 언급하기도 했다. 1949년, 24살의 그가 아내 캐롤라인(2000년 작고)에게 청혼했던 런던 시내 한 공원의 벤치. 그는 그 벤치를 훗날 사들여 집 앞마당에 두고, 작가이자 페미니스트이자 견결한 사회주의 동지였던 아내와 나란히 쉬곤 했다고 한다. 부부는 만 50년 해로하며 네 자녀를 뒀고, 장남 힐러리 벤은 1999년 하원의원에 당선, 토니 블레어 정부의 각료를 지냈다. 그는 2,000만 단어 분량(편집본 11권)의 일기(Benn's Diary)와 민주주의의 멋지고 소중한 추억을 남겼다. 그리고, 민주주의의 미래를 믿는 인류에게 용기와 영감을 주었다. 1983년 데일리 메일과의 인터뷰에서 그는 묘비명으로 "토니 벤, 그는 우리에게 용기를 주었다(He encouraged us)"를 원한다고 말했다.
그가 떠난 영국에는 영화(2006 칸 황금종려상)의 감독 켄 로치의 발의로 출범한 새 좌파 정당 '레프트 유니티(Left Unity)가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레프트 유니티 홈페이지에는 '토니 벤: 우리도 영웅이 될 수 있다고 용기를 준 영웅(Tony Benn: a hero who encouraged us to be heroes too)'이라는 제목을 단 추도문이 실려 있다.
최윤필기자 proos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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