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거짓말이었으면 좋았을 조사가 나왔다. 10만 명 당 28.1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의 2.3배에 이르는 세계 최고 자살률의 실태 조사였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정부의 공식발표로 들으니 더욱 기가 찼다. 9년째 세계 최고 자살률을 기록하는 나라의 정부가 최초로 주도한 조사라서 더 그랬다. 정부가 처음으로 그 대책을 세운 것은 백번 잘한 일이지만 최근 9년만의 문제였던 것은 아니다. 사실은 10만 명 당 29.8명이 자살한 1965년, 31.9명이 자살한 1975년, 아니 그 전부터 세계 최고 수준이었을지 모르니 우리의 자살률은 오래전부터 심각했다. 게다가 적어도 그렇게 조사된 이래 반세기 동안 30명 수준으로 거의 변화가 없다니 참으로 기가 차다.
1세기도 더 넘은 1897년, 자살에 대한 유일한 고전을 쓴 뒤르켕은 자살이 범죄와 마찬가지로 어느 나라에서나 비슷하게 나타난다는 실태 조사를 근거로 하여 자살을 범죄처럼 어쩔 수 없는 자연현상이라고 했지만, 적어도 이는 그가 한국에서 OECD 평균의 2배 이상이라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한 소리에 불과할지 모른다. 뒤르켕 이래 수많은 사회학자들의 자살 연구도 마찬가지 결과라면 한국은 그야말로 특수한 예외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10만 명 당 10여명만이 자살하는데 왜 한국에서는 그 2배 이상이 자살하는가. 자살하기에 너무 좋은 나라인가?
여러 가지 부정적인 세계 최악 중에서도 더 이상의 최악은 없는데도 자살에 대한 실태조사조차 유사 이래 처음이라니 참으로 기가 차지만, 더욱 기가 찬 것은 아무리 보건복지부라고 해도 자살에 대한 유일한 대책을 전국민 정신건강검진 추진이라고 한 점이다. 이는 자살 시도의 이유 중 가장 큰 것이 우울감 등 정신과적 증상으로 37.9%였다는 조사 결과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런 대책은 1세기도 전에 뒤르켕이 자살을 정신병의 일종이라고 보았던 것으로부터 나온 것과 같기에 더욱 기가 차다. 그나마 그 전에 악마의 짓이니 하여 종교적으로 단죄된 것보다는 낫다고 할까? 이번 조사에서도 종교를 가진 사람의 자살률이 더욱 낮게 나타났고, 그것도 기독교도가 16%인 것에 비해 불교도는 9%여서 자살 대책으로는 종교, 특히 불교를 믿는 것이 최고라는 식의 이야기도 흘러나왔지만, 그것이 설마 신이나 부처의 탓이라고 본 것은 아닐 것이다. 종교만이 아니라 지나친 도덕주의적 분위기도 자살의 방지에는 크게 도움이 될 수 없다.
자살 시도의 이유로 정신과적 증상 다음으로 많은 것이 대인관계로 31.2%이고, 세 번째가 경제 문제로 10.1%라고 하지만 최근의 자살 현상 중에서 역시 가장 심각한 것은 빈곤 문제다. 단적으로 극단적인 격차로 가난에 허덕이는 사람들에 대한 사회보장을 비롯한 사회안전망의 절대적인 부족 탓이다. 정신과적 증상이나 대인관계 등의 요인도 가난 탓인 경우가 많다. 특히 대부분의 나라에서 자살하는 비율보다 한국에서 유독 2배 이상인 이유가 그것이다. 그야말로 죽지 못해 살다가 그것도 안 되기에 스스로 죽는 것이다.
그래서 자살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대부분 타살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스스로 죽도록 뒤처지고 내몰리고 쫓긴 탓이다. 나라가, 세상이, 사회가, 이웃이 죽이는 것이다. 내가, 우리가, 여러분이 죽이는 것이다. 그 누구도 누구의 어떤 자살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 자살자는 우리에게, 우리 사회에, 우리나라에 절망하여 우리와 절연한 것이다. 우리나라는 살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기에 죽는 것이다. 잘 사니 어쩌니 저쩌니 하지만 지금처럼 죽고 싶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리는 시절이 또 있었던가?
그래도 스스로 목숨만은 끊지 마라. 제발, 죽어도 죽지마라. 죽어도 살아라. 무조건 살아라. 삶에 조건은 없다. 삶에 조건이 있어야 한다면 그 누구에게도 살아갈 자격이나 권리는 없다. 그러니 누구에게도 살아갈 가치가 없다느니 하며 손가락질 하지 마라. 자살을 미화하는 어떤 소리도 하지 마라. 죽어도 죽지마라. 죽어도 함께 살자.
박홍규 영남대 교양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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