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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플러스한국대구 맞춤가발 명장 최원프리모 최원희 <효특집>나의 아버지

입력
2014.04.07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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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신 아버지

나는 아버지를 떠올리면 절제라는 단어가 연상된다. 아버지는 절제된 삶을 강조했다. 주도(酒道)를 가르칠 때도 “취하도록 마시지 마라” 정도가 아니라 몇 잔 마실지를 정한 뒤 한 모금이라도 더 마시지 말라고 강조했다. 그 외에도 군것질을 하지 말 것이며, 일을 할 때도 늘 계획성 있게 하라고 가르치셨다.

아버지의 그런 태도는 아마도 젊은 시절의 경험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조선이 나라를 잃고 십 수 년이 지난 1923년에 태어났다. 누구 할 것 없이 일제의 서슬 퍼런 통제와 착취 아래 불안하고 위태한 삶을 살던 시절이었다.

# 아버지 밑에 딸린 식구(食口)가 열 넷

아버지는 10대에 들어설 무렵부터 이사를 자주 다녔다. 우리에게 위안부로 알려진 ‘처녀 공출’ 때문이었다. 조부모님께서는 금귀옥조처럼 키운 딸들을 왜놈에게 빼앗길까봐 늘 전전긍긍하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고향은 고령 개진면 개포에서 살았지만 어머니가 나를 낳으신 곳은 성주 골짝이었다. 가야산 아래 첫 동네였는데, 마을 바로 위에 육군 레이더 기지가 자리를 잡았을 정도로 깊은 산골짝이었다.

‘처녀 공출’은 아버지의 결혼 연령도 낮추었다. 아버지는 14살에 결혼했다. 그때 어머니의 나이는 겨우 10살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중학생, 초등학생 나이에 결혼한 셈인데, 우리나라에 조혼 풍습이 있었다지만 그렇게 일찍 혼례를 올린 건 일제 때문이었다.

결혼 후에도 마음 편히 살 수 없었다. 이번에는 아버지가 징용 나이에 걸렸다. 결혼 후 몇 년 동안 만주로 피신을 했다. 자세히 여쭈어보지 않아서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아마 1940년 즈음이었을 것 같다. 어린 나이에 가족을 떠나 숨어 다니는 일이 여간 고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대 그런지 나는 ‘타향살이’라는 노래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면 아버지가 혼자 이역을 떠돌던 모습을 상상하곤 한다.

일제가 물러나고 나서도 아버지의 삶은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딸린 식구(食口)가 열 넷이었다. 동생 다섯에, 큰아버지가 일본으로 가면서 남기고 떠난 사촌 동생 둘, 그리고 당신이 낳은 자식이 칠남매였다. 그 많은 식구가 모두 아버지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 많은 식구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번도 배를 곯은 적이 없었다. 그때는 잘 몰랐지만 그 많은 식구를 먹여 살린 아버지가 얼마나 힘드셨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숙연해진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마을에서 제일 부지런한 농사꾼이었다. 늘 새벽같이 일어나 논밭으로 나가셨다. 농한기에는 소장수를 하셨다. 그렇게 악착같이 일해서 동생과 사촌 동생을 모두 혼사시키고 우리 일곱 남매를 훌륭하게 키워냈다.

아버지는 늘 말수가 적었다. 꼭 필요한 말만 하시고 모든 것을 행동으로 보여주셨다. 누군가는 그런 삶의 태도를 놓고 ‘숨이 막힌다’고 하지만, 아버지가 처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 인생은 새옹지마, 늘 감사하며 사신 아버지

내 아버지와 관련해 가장 존경스러운 부분은 그렇게 고된 인생을 사셨지만 불평하는 모습을 한번도 보이신 적이 없었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셨고 굳건하게 살아내셨다. 나는 그 엄청난 짐을 지고서도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으신 비결이 무엇인지, 어떤 경험이 아버지를 그런 마음의 경지로 이끌었는지 궁금했다. 사실, 어떤 경험은 일생을 통해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아버지에게 평생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았던 경험은 아마도 6.25 전쟁 후 고향인 고령에 가서 본 광경이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고향 마을은 낙동강 줄기 옆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지나는 길에 살던 곳에 들렀더니 마을이 폭격으로 쑥대밭이 되어 있더라고 했다. 아버지는 “하늘에서 보면 강줄기가 언뜻 활주로처럼 보이는데 그래서 폭격을 때린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가 살던 집은 군인들의 막사쯤으로 오해받았을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종종 말했다.

“거기서 계속 살았으면 우리 집안은 아마 몰살당했을 거다.”

징용 때문에 고향에서 쫓겨나다시피 해서 가야산 아래 첫 동네까지 숨어들었지만 그 덕에 폭격으로 횡사하는 불행을 피할 수 있었다는 것이었다. 새옹지마가 이렇게 딱 들어맞는 이야기도 드물 것이다.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있고, 안 좋을 때가 있으면 행복한 때도 있다. 행운과 불행이 분주하게 교차하는 가운데, 어떤 불행은 우리 삶을 더 좋게 만드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내 아버지가 바로 그런 행운을 잡은 것이었다. 삶은 그렇게 양면적이다.

평생 아버지를 짓눌렀을 가족에 대한 책임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책임감은 가슴을 답답하게도 하지만 흔들리지 않게 붙드는 안전벨트가 되어주기도 한다. 아버지에게는 가족이 바로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당신은 가족을 부양하고 자식을 교육시키려고 평생 단 한번도 곁눈질을 하지 않고 충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오셨다.

나도 나름대로 내 분야에서 명장의 반열에까지 올랐지만 아버지만큼 열심히 살았나, 돌이켜보면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아버지를 더 닮기 위해, 노력하고 애쓰며 살아야겠다는 생각밖에 없다. 내게 그런 훌륭한 아버지를 주신 하늘에 감사드린다.

◆ 아버지 최경달(1923~2000)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평생 땅을 일구며 살았다.

◆ 최원희熙(1955~) 이발사로 시작해 대한민국 최고의 가발 명장으로 자리 잡았다.

정리 김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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