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중동부의 소국 르완다 국민들은 수도 키갈리 한복판에 우뚝 솟은 '키갈리 시티타워'를 바라볼 때마다 자부심을 느낀다. 2005년까지만 해도 버스정류장이 있던 이 곳에 장기간(5년) 공사를 거쳐 2011년 들어선 이 건물이 바로 르완다 최고층(20층) 빌딩으로, 르완다의 경제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건물에는 동아프리카지역 최초로 4D스크린을 보유한 영화관, 은행, 대형 유통업체 등 각종 사무실과 상업시설이 들어섰다. 1994년 대학살 이후 20년이 흐른 지금 르완다는 아픔을 딛고 새롭게 도약하고 있는 것이다.
아픔 딛고 일어선 경제
르완다는 최근 10년간 연평균 8%안팎의 경제성장을 구가해 전 세계에 드리운 경제침체를 무색하게 했다. 그 덕분에 각종 경제지표가 꾸준히 나아졌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세계은행 등에 따르면 르완다의 구매력기준 국내총생산(GDP)은 지난해 163.7억 달러를 기록했다. 세계 142위로 아직 저개발국가에 속하지만, 2004년(68억 달러)에 비해 크게 나아졌다. 하루 2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극빈층도 2000년엔 10명 중 9명꼴(89.1%)이었으나 2011년 6명 수준(63.2%)로 개선됐다. 국민 2명 중 1명은 휴대전화에 가입했고, 지난해에는 국민 95%가 4세대 통신망을 사용할 수 있도록 통신망 구축사업도 시작했다. 삶의 질도 나아져 에이즈 감염률(6.2%→2.9%)과 영아사망률(124.4명→59.6명)이 대폭 감소했고, 대학살 당시 28.3세였던 기대수명도 59.26세로 2배 이상 늘어났다.
이 같은 성과는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섰기 때문에 가능했다. 헌법 개정으로 인해 2003년 처음 직접선거로 실시된 대선에서 압도적 지지로 당선된 투치족 출신 폴 카가메 대통령은 영세농업에 의존하는 나라 경제를 어느 정도 먹고 살수 있을 정도인 중위소득국가로 끌어올리기 위해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정부는 국유산업 민영화, 각종 산업규제 철폐, 서비스분야 강화 등의 조치를 취했다. 2008년엔 투자장벽을 낮추도록 르완다개발위원회(RDB)를 설치, 2000년대 초 90억 달러였던 해외투자액이 지난해 800억 달러를 넘어섰다. RDB는 "전에 두 달 정도 걸리던 사업등록 절차를 지금은 24시간 내 마무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08년 세계은행이 꼽은 '세계에서 가장 사업하기 좋은 국가' 150위였던 르완다는 2011년 58위로 뛰어 올랐다. 미국 컨설팅회사 AT커니는 최근 아프리카에서 가장 투자하기 좋은 나라로 르완다를 꼽았고, 뉴욕타임스도 최근 "중국 경제성장세가 둔화하고 신흥시장이 불안해지자 르완다가 투자대상으로 주목 받는다"고 보도했다.
쉽게 아물지 않는 상처
고도성장에도 불구하고, 대학살의 상처가 아무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정부는 학살가담자를 처리하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모이는 풀밭'이라는 뜻의 전통 재판 '가차차'를 활용했다. 정부는 2001년 전국 1만2,100개 마을에 가차차를 설치하고, 가해사실을 인정하고 용서하는 가해자는 낮은 징역형이나 공익형 노역을 선고했다. 반대로 자백을 거부하거나 주민들이 자백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사형 또는 무기징역의 중형을 선고했다. 가차차 법정은 가담자의 65%에 유죄를 선고하고, 지난해 6월 종료했다. 카가메 대통령은 당시 "복수나 사면처럼 손쉬운 방법 대신 국민 화합과 국가 통합을 위해 어려운 길(가차차 법정)을 택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학살 피해자에 대한 보상 등 풀어야 할 과제가 많이 남아있다. 올해 활동을 종료하는 르완다국제형사재판소는 아직 반인도적 범죄자에 대한 처벌을 남겨 놓고 있다. 2008년 프랑스령 마요트섬에서 체포돼 집단학살과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된 전 르완다 정보기관 최고책임자 파스칼 심비캉와는 약 6년이 흐른 지난 2월에야 파리법원에서 재판이 시작됐다.
◆ 르완다 대학살
르완다 대학살은 종족갈등에서 비롯됐다. 벨기에가 1916년부터 르완다를 식민통치하면서 인구 85%를 차지하는 토착 후투족 보다 소수인 투치족을 우대해 양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독립(1962년) 3년 전 후투족이 투치족 왕을 몰아내고 장기 집권했고, 투치족도 르완다애국전선(FPF)를 조직해 1990년 내전을 시작했다. 1994년 4월 후투족 출신 르완다 대통령과 부룬디 대통령이 함께 탄 전용비행기가 르완다의 수도 키갈리에서 추락해 사망하자, 정권은 투치족이 결성한 르완다애국전선(RPF)의 암살로 간주해 투치족과 온건 후투족을 무차별 살해하면서 대학살이 시작됐다. 우간다 등에 피신해 있던 투치계가 내전에서 승리해 그 해 7월 대학살이 끝났지만, 100만명이 사망했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