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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1945년~60년대 중반까지 딸 셋 아들 하나 키운 육아일기… 수채화·사진 곁들여 곱게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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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싶은 책] 1945년~60년대 중반까지 딸 셋 아들 하나 키운 육아일기… 수채화·사진 곁들여 곱게 담아

입력
2014.04.04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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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둥이가 귀여워 열심히 사진을 찍어주고 있다. 별난 재주는 없어도 흔한 디지털카메라로 연사를 해댄 뒤 골라 보면 꽤 예쁜 사진이 나온다. 거기까지는 좋은데 그래서 쌓이고 쌓인 사진이 수천 장이다. 정리가 안 된다. "아, 그때 그 사진 좋았는데" 하고 찾는 데만 한참이다.

요즘은 아이가 그림 그리기에 신명이 났다. 자고 일어나면 얼른 도화지부터 갖고 와서 색연필이나 크레용으로 쓱쓱싹싹 그린다. 아비 눈에 대견한 그림들이 집안 벽과 창문에 빈틈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붙어 있다. 그리는 족족 붙여놓다 보니 드디어 이것도 감당이 안 된다.

아이가 소중한 만큼 아이의 성장도 사랑스럽기 마련이다. 그 기억을 남기고 싶은 건 부모라면 한결 같은 마음이다. 하지만 짐작건대 아이가 장성한 뒤 보면, 커가는 아이를 귀여워하는 그 마음만 같지 쏟는 정성은 달랐다는 것을 알 것도 같다. 감당불능 상태의 사진파일이나 '작품'을 얼른 간추리지 않으면 나 역시 '실격부모'가 될지도 모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라는 책을 만난 덕분이다.

이 책을 읽은 건 불과 3년 전이다. 신간 소개 담당이었을 때 출판사에서 보내온 책이었다. 2001년에 나왔다가 절판된 책을 되살려 거기다 필자의 다른 에세이에 실렸던 글이나 회고담 같은 것을 추가해 새로 낸 것이었다. 신문에서는 대개 이런 재출간 도서를 비중 있게 소개하지 않는다. 그런 '상식'을 깨고 당시 구순을 앞둔 박정희 할머니와 전화통화로 이런저런 사연까지 물어가며 이 책 기사를 크게 썼다.

그때 할머니가 들려준 얘기가 이랬다. "큰 딸 아이(명애)가 초등학교 갈 나이가 되니까 그림책을 사달라고 합디다. 그래서 뭘 사주나 하고 봤더니 스토리가 마음에 들면 지질이 나쁘고 지질이 마음에 들면 스토리가 비교육적이야. 삽화도 엉터리여서 싫구나 하는 게 있더라고. 그래서 사주질 못했지." 육아일기를 쓴 계기가 그냥 내 귀여운 자식의 성장을 기록하겠다는 식의 감정만 있는 게 아니라 '교육'이라는 목적의식이 뚜렷하다.

큰 딸 명애가 태어난 1945년 광복 무렵부터 딸 현애, 인애, 순애에 이어 막내 아들 제룡이 일곱 살이 된 1960년대 중반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이 책에는 실물 육아일기가 사진으로 함께 실려 있다. 자식을 향한 사랑이야 컴퓨터 자판으로 투닥닥 쳐서 블로그 같은데 올리는 요즘 '맘'들이나 박정희 할머니나 매한가지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육아일기 실물을 보면 '정성'이 다르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다. 매일매일 일어났던 일을 정성스럽게 메모했다가 그 일들을 정리해 곱게 새로 쓰고 취미로 좋아하던 수채화와 사진까지 덧붙이는 정성이 단번에 전해오기 때문이다.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차이가 이런 걸까.

육아일기의 내용도 정겹기 그지 없다. 셋째를 낳고 한 달 만에 6ㆍ25전쟁이 났을 때 '할아버지 품에 안겨 내가 불 끄러 밤새도록 다니다 와도 울지 않고 자는 너'라고 대견해 하거나, 그때 여섯 살이던 큰 딸이'우리 재미있게 피난 가는 장난하자'던 이야기 같은 건 비현실적이어서 너무 현실적일 정도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만이 아니라 할머니와 인터뷰 하면서 느낀 게 또 많다. 전화로 꼬치꼬치 묻는 내게 처음엔 또박또박 잘 대답해주시던 할머니가 어느새 야단을 치시는 거다. "기자 양반, 거참 편하게 취재도 하시려네. 더 알고 싶거든 와서 하시구랴. 이만 끊소." 얼굴이 벌개졌다. 책에 담긴 대로 아이들과 아날로그 인생을 살아 온 할머니에게 얼굴도 모르는 기자와 길게 전화통화하는 게 마뜩했을 리 없다. 그때도 지금도 나는 왠지 인생을 잘못 살고 있는 것 같다.

김범수 국제부장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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