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대법원이 기업과 이익단체의 기부제한을 푼 지 4년 만에 이번에는 개인의 기부총액 규정마저 폐지했다. 미국 정치가 금권, 부자에 휘둘린다는 미국판 정경유착에 대한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미 연방대법원은 2일 정부가 개인의 정치 후원금 총액을 제한하는 것이 수정헌법 제1조가 규정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현행 선거자금법은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이후 정치부패를 막기 위해 개인의 정치 후원금 총액을 후보 1인에 대해 연간 2,600달러, 후보가 다수인 경우에는 2년에 4만8,600달러, 당 위원회 등에는 7만4,600달러로 제한했다. 대법원은 이 가운데 후보 1인에 대한 2,600달러 규정은 놔두고 나머지 2개의 총액 규정을 위헌으로 판단, 사실상 개인 기부제한 규정을 무효화시켰다. 앞서 대법원은 2010년 1월 기업, 이익단체, 노조가 정치외곽조직인 슈퍼정치행동위원회(슈퍼팩)를 구성해 선거에 직접 뛰어들 수 있고, 슈퍼팩들은 선거자금을 거의 무제한 살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결국 이번 위헌결정은 비제도권 슈퍼팩에 이어 제도권인 정치행동위원회(PAC) 등을 통한 선거자금 모금을 자유롭게 허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법관 9명 가운데 보수, 진보 구성대로 위헌 찬성 5, 반대 4로 의견이 갈린 이번 결정에서 찬성의견을 낸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정부가 개인이 후원할 후보자 숫자를 제한하는 것은 언론의 공개지지 후보 숫자를 제한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이번 대법원 결정은 올 11월 중간선거와 2016년 대선을 앞두고 민주, 공화 양당의 정치지형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만큼 파장이 클 전망이다. 우선 거액 기부자나 부자들은 원하는 후보에게 원하는 만큼을 후원하는 것이 가능해져, 이들의 정치적 영향력이 확대될 수밖에 없다. 뉴욕타임스는 앞으로 1인이 기부할 수 있는 정치 후원금 총액이 250만달러에서 대선기간에는 최대 360만달러로 늘어난다고 계산했다. 2012년 대선에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선거자금 10억달러는 앞으로 거액 기부자 300~400명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는 셈이다. 이들과 끈이 닿아 있는 당 지도자, 의회 실세, 대통령 등의 당내 장악력도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공화당 존 베이너 하원의장, 민주당 해리 리드 상원 다수당 대표의 경우 공동선거자금을 모아 각 지역 후보들에게 나눠주면서 당 주도권을 확실히 할 수 있다. 당 별로는 거액 기부자들의 지지를 받는 공화당이 당장 선거자금이 몰려들어올 것으로 보고 이번 판결을 반기고 있다.
선거감시단체 디마크러시21은 "대법원이 정치적 영향력을 가지려는 거액 기부자와 이들의 돈을 유치할 수 있는 정치지도자 사이에 위험한 부패 관계를 재구성했다"고 비판했다. 진보 진영의 스티븐 브레이어 대법관도 소수의견에서 "4년 전 선거자금의 빗장을 푼 대법원이 그 봇물까지 터뜨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와 거액 기부자 사이의 불투명한 거래는 이미 공공연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를 오히려 현실화시켜 정치판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특히 정치자금이 당에 집중될 경우 그 동안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선거판을 뒤흔들며 제도권 정치를 무력화시킨 슈퍼팩의 영향력이 줄어들 것이란 기대도 높다.
워싱턴=이태규특파원 tg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