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밝은 성격이던 여중생 A양은 1년 전부터 갑자기 의기소침한 모습을 보였다. 말 수도 줄고, 집에서도 방에 혼자 있고 싶어했다. 조그만 소리에도 깜짝 놀라는 등 주변을 지나치게 경계하기도 했다. 일명 '일진회'에서 탈퇴한 후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하는 등 학교폭력에 시달린 이후부터였다. A양은 결국 부모가 집을 비운 사이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모에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건네며 "가지고 있으라"는 특이행동을 한 몇 주 뒤였다.
급성 스트레스에 취약한 젊은 층
보건복지부는 1일 자살실태조사와 함께 진행한 72명 자살 사망자 유가족을 대상으로 심리적 사인(死因)을 밝히는 심리적 부검 결과도 밝혔다. 이를 통해 자살 유형을 4가지로 분류했다.
실제 부검 사례를 재구성한 A양의 경우는 '급성스트레스 유형'이다. 생애 전반에 심각한 질병, 경제적 어려움, 대인관계 단절 등이 없었지만 A양처럼 자살 전 1년 이내에 발생한 특정 스트레스로 인해 세상을 버린 경우다. 학업, 취업 등에 실패하거나, 경제적 문제, 대인관계 등으로부터 받는 스트레스가 자살을 부추기는 원인이 된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30대 미만의 젊은 층은 이렇듯 갑작스레 맞닥뜨린 스트레스가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 안용민 서울대 의대 교수는 "A양처럼 10대가 주로 이 유형에 해당하는데, 자살 전 어떻게든 가족들에게 신호를 보내거나 단서를 주는 경우가 많으므로 이를 놓치지 말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동반자살, 만성 스트레스 유형
충격적인 스트레스가 없어도 가랑비에 옷 젖듯 질병, 폭력, 학대, 빈곤 등이 전 생애에 걸쳐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경우 역시 자살에 이르기 쉽다. 최근 생활고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송파 세 모녀 사건'이 이렇듯 '만성 스트레스 유형'의 자살로 볼 수 있다. 김경일 아주대 심리학과 교수는 "송파 세 모녀 사건은 장기간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전형적인 만성 스트레스 유형의 자살"이라며 "생활고 자살, 간병자살 등 일반적인 사회적 자살이 대개 이 유형에 속한다"고 말했다.
이 유형의 자살 사망자의 경우 소득 파악이 된 14명 중 11명이 월 소득이 200만원 이하였다. 빈곤이 자살을 부추기는 만성 요인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김 교수는 "주기적으로 자살 고위험군 가정을 방문하는 등 지역사회가 개입하면 자살예방 가능성이 높다"고 조언했다.
또 다른 재구성 사례인 30대 남성 B씨도 이에 해당한다. 외동인데다 부모가 모두 지방 출장이 잦아 집을 비우는 일이 많았던 B씨는 외로움을 많이 탔다. 청소년기 학교나 성당에서도 마음을 툭 터 놓을 친구가 없었다. 대학생이 돼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울면서 "인생이 너무 힘들다"고 종종 하소연했다. 결국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친구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주변 사람들에게 '죽음'이나 '천국'에 관한 말을 자주 꺼낸 지 일주일 만이었다.
자살시도 반복, 정신질환 위험
생전에 지속적으로 자살을 시도하고, 자살의도를 표현하거나, 자해시도를 반복하다 자살에 이르는 유형도 있다. '적극적 자해 혹은 자살시도·표현 유형'으로 분류된다. 이 유형에 속하는 자살 사망자들은 배우자의 외도, 아버지의 학대 등 가족관계에서 위험요인에 지속적으로 노출된 경우가 많았다.
끝으로 많이 알려진 '정신과적 유형'이 있다. 우울증, 정신분열증, 공황장애, 환각, 환청 등 1개 이상의 정신과 질환을 진단 받은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심리적 부검 72건 중 급성스트레스 유형이 19건, 만성스트레스 유형 17건, 적극적 자해 혹은 적극적 자살시도·표현 유형 13건, 정신과적 문제 유형이 22건이었다.
위험요인 많이 해당되면 고위험군
복지부는 이들 4가지 유형으로부터 총 14가지 자살 위험요인과 연령대별 가중 위험요인을 추려냈다. 거의 모든 사망자에서 나타난 공통 위험요인은 ▦자해 2회 이상 또는 자살시도 1회 이상 ▦최소 2회 이상의 반복적인 자살의도 표현 ▦정신과적 진단 1회 이상이었다. 이보다는 빈도가 낮지만 상당수에게서 발견된 추가적 위험요인으로 ▦관계 단절 ▦무직·파산·실직·5,000만원 이상의 빚 중 2개 이상 ▦스트레스 ▦이혼·사별·독신·별거 중 2개 이상 ▦불행·가정폭력·학대·방임·협박 중 2개 이상 등 11개를 제시했다. 연령별로 20대는 장애나 외모적 콤플렉스 등 최근 신체건강 문제, 40대는 부부문제, 50~60대는 가족·지인의 신체건강 문제가 가중 위험요인으로 꼽혔다.
이중규 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장은 "공통 위험요인이 1~2개 이상, 추가적 위험요인이 3~5개 이상, 연령대별 가중위험요인이 포함되어 있는 경우 자살 예방을 위해 즉각적인 개입이 필요한 자살 고위험 단계로 분류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대는 SNS, 50대는 당부말 살펴야
연령대별로 특징적인 자살 예고 징후도 나타났다. 20대 이하의 경우 SNS 사진이나 문구가 자살과 관련된 내용으로 바뀌며 보험 해지, 하드 포맷 등의 신변 정리에 들어간다. 또 사후관계와 관련된 질문을 하거나 인터넷에 자살 방식을 검색한 것으로 드러났다. 30∼40대의 경우 알코올 중독이 심해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과거의 잘못을 빌기도 한다.
50∼60대는 주위 사람들에게 평소와는 다르게 호의를 베푸는 등 특이한 행동을 하며,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하거나 자식들에게 "어머니·아버지를 잘 모시라"는 당부의 말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몸이 불편한데도 이불 빨래를 하는 등 주변 정리를 하거나 가족을 위해 무엇을 사놓는 행동 등도 자살을 앞둔 이들의 특징적인 행동이었다.
복지부는 이번에 나타난 우리나라의 자살 유형과 위험요인, 연령대별 자살 예고 징후를 활용해 앞으로 자살 고위험군을 발굴, 조기개입하겠다고 밝혔다.
송옥진기자 clic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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