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차장인 A(39)씨는 2012년말 살던 아파트를 팔고 전세로 옮겼다. 1억5,000여만원의 여유자금이 생긴 그는 가장 안전한 투자처인 1년 만기 국공채에 돈을 넣었다. 2년 뒤 아파트에 들어갈 입주대금이었다. 작년 말 만기가 돌아오자 또다시 국공채에 투자하려던 A씨에게 거래은행 직원은 특정금전신탁에 가입할 것을 권유했다. 태양광 관련 프로젝트파이낸싱(PF)의 자산담보부 기업어음(ABCP)에 투자하는 상품이었다. 은행 직원은 "KT가 100% 지분을 소유한 KT ENS가 지급 보증해 안전하고 3개월만 투자하면 연 5%의 수익을 얻을 것"이라고 했다.
은행 직원만 철석같이 믿고 가입했던 특정금전신탁은 사실상 휴지조각이 됐다. KT ENS가 "루마니아 태양광 PF와 관련해 491억원 규모의 기업어음(CP)을 상환할 여력이 없다"며 지난 12일 법정관리를 신청해 버린 것. 만기가 열흘도 채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A씨는 "대기업이 자사 직원이 사기대출에 연루된 것도 모자라 '나 몰라라' 식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투자자들까지 기만한 격"이라며 "은행에 찾아갔더니 '우리도 대기업의 지급보증을 믿고 추천했다'고 발뺌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KT ENS 대출 사기 파장이 이 회사 관련 특정금전신탁에 가입했던 투자자들에게까지 튀었다. 피해자는 개인 625명, 법인 44개사로 이들이 입은 손실만 1,000억원이 넘는다.
31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KT ENS는 2009년 태양광 사업에 참여하면서 특수목적법인(SPC)을 세웠고, 이 SPC를 통해 1,857억원의 ABCP를 발행해 자금을 조달했다. 원리금 상환은 KT ENS가 지급 보증했다. 이 가운데 1,177억원 규모의 ABCP는 6개 금융회사의 금전신탁에 판매됐다.
피해 보상은 요원하다. 법정관리에 들어간 KT ENS의 회생 계획안에 따라 회수 규모가 결정된다. 법원이 회생 계획안을 인가하기까지 상당기간이 걸리는 것은 물론 원금 손실도 클 것으로 전망된다. 피해 구제의 관건은 금융회사가 투자자들에게 충분히 위험성을 설명했는지 여부. 이에 따라 금감원은 31일부터 특정신탁상품을 판매한 기업 경남 대구 부산은행 등 4개 사에 대해 불완전판매 특별검사에 착수했다. 금감원 관계자는 "일부 금융회사들의 불완전 판매 여지가 있어 들여다 볼 예정"이라며 "만약 판매 과정의 문제가 확인되면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대혁기자 selected@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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