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인문학의 시대다. 학교 바깥으로 나간 인문학은 사설 연구소, 백화점 문화센터, "사람이 미래"를 외치는 기업, 최근엔 TV로까지 영역을 넓히는 중이다. 소위 인문학 남발 현상은 그 효용과 의도를 의심하는 목소리들을 키웠지만 그러한 남발조차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는 분야가 있다. 바로 디자인이다. 디자인평론가 최범씨는 "사방에 인문학이 넘쳐나는데 정작 디자인 분야에선 아무도 인문학을 얘기하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다양한 저술활동을 통해 한국 디자인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안을 제시해온 최범씨는 국내에서 디자인평론가란 직함을 단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그가 최근 디자인인문연구소의 소장에 임명됐다. 디자인 대안학교 파주타이포그래피학교(PaTI)의 부설 연구소 중 하나로 지난달 출범한 디자인인문연구소는 디자인과 인문학의 결합을 전면에 내세운 국내 최초의 교육기관이자 연구소다.
-디자인과 인문학의 조화를 전면에 내세웠다. 두 영역이 만나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디자인은 우리의 삶을 쾌적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인문학을 '세계와 삶에 대한 물음'이라고 정의한다면 디자인에도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디자인이 세계와 인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이런 질문은 지금껏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지금 한국 디자인의 주인은 국가와 자본이다. 디자인이 국가를 위해, 즉 부국강병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만 난무하고 있다."
-부국강병을 위한 디자인이 인간의 삶도 풍요롭게 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있다. 부국강병과 풍요로운 삶 사이엔 어떤 교집합도 없을까.
"디자이너가 부국강병의 도구로 쓰이는 한 디자인은 우리 삶에 어떤 편리도, 아름다움도 줄 수 없다. 최근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파크(DDP) 앞에 붙는 수식어가 뭔 줄 아나. '디자인 창조산업의 발신지'다. DDP의 목표는 서울 시민의 디자인적 가치관을 고양하는 것이어야 한다. 창조산업은 그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데 수식어에 사람은 없고 대신 산업이 들어가 있다. 5,000억원 예산의 최종 목표가 산업인가. 이건 명백한 가치전도다."
-이에 대해 디자인인문연구소가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인간을 생각하는,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디자인 전문가의 육성이다. 단, 디자이너를 제외한 디자인 평론가, 디자인 행정가, 디자인 큐레이터, 디자인 역사가 등에 한정할 계획이다."
-디자이너를 제외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한국 디자인 교육은 거의 100% 디자이너만 양성하고 있다. 다양한 직능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것을 업계라고 한다면 한국 디자인 업계는 생태학적으로 큰 문제가 있다. 디자이너 밖에 없다는 것은 이론가는 없고 기술자만 있다는 의미다. 이는 디자인 업계 종사자들이 스스로를 도구화하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어떤 기준으로 학생을 뽑고 무엇을 가르치나.
"가을 시작될 첫 학기의 학생을 5월 중 모집할 계획이다. 소수의 인원을 대상으로 한 철저한 개인맞춤형 교육을 할 것이다. 총 2년 과정으로 대학원과 비슷하지만, 전형자격을 제도권에 맞출 생각은 없다.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우리가 세운 기준에 맞으면 함께 할 수 있다. 연구소의 또 다른 주요 활동은 저널 발간이다. 비주얼 중심의 화려한 디자인 잡지는 많지만 디자인 담론을 다루는 잡지는 거의 없다. 한국 디자인이 기술의 벽을 넘으려면 담론이 반드시 필요하다. 디자인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보는 잡지'가 아닌 '읽는 잡지', 디자인에 대한 사유를 넓히는 잡지를 발간할 계획이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