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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4월 1일] 루마니아에는 차우세스크가 없다

입력
2014.03.31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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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 있다. 미간에 깊게 팬 주름과 은근히 드러나는 경계는 공포를 아는 자의 것이라 추측하게 하는 눈빛이다. 하늘은 청명하건만 이방인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옹기종기 모여 앉은 어른들의 표정으로 본 이 나라 참 어둡다.

자정을 막 넘겨 들어선 부크레슈티 공항은 아침에 길을 나서기 전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선잠을 청하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내가 그 대열에 합류하게 될 줄 몰랐던 짧은 시간은 송곳니를 세운 백작을 상상하는 동안 저 멀리 달아나고 마중을 나오겠다던 축제관계자는 감감무소식이다.

그렇게 두 시간 여, 날이 밝으면 첫 비행기를 잡아타고 귀국할 요량으로 마음을 다독이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누군가 갈 테니 조금만 더 기다려라". 대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제 난 모르겠다.

새벽 3시, 사내 하나가 다가와 휴대전화를 보여준다. 뜻을 알 수 없는 글자배열 가운데 내 이름이 있다. "아, 살았다. 4시간 거리라 했으니 넉넉잡아 5시간 후면 침대에 몸을 누일 수 있다." 이렇게 기대에 부풀어 스페인 공연단과 함께 악기들 사이로 간신히 벌려놓은 공간에 엉덩이를 걸치고 수도를 떠났다. 묻고 싶은 것은 많지만 어차피 불가능한 기사와의 대화는 포기하고 졸며 깨며 수선스러운 뮤지션들과 떠들다 보니 차창너머 루마니아 시골에도 어김없이 아침이 찾아온다. 이때만 해도 이국의 여명에 넋을 놓을 여유가 있었건만 차는 길을 몰라 헤매고, 정해준 순서대로 내려줘야 하기 때문에 수 차례 호텔정문을 스치는데 문 열어줄 생각을 않는다. 이렇게 7시간을 휴게소 하나 없는 시골길을 달려 드라큘라백작의 고향, 트란실바니아의 주도 시비우에 도착했다.

축제 운영이 엉망이라고? 맞다. 귀국 길에도 똑같이 탑승 마감 3분 전에, 공항 보안요원을 불러대고서야 좌석에 슬라이딩 했으니 도저히 후하게 점수를 쳐줄 수 없겠다. 그러나 또 가겠냐고 묻는다면 난 다시 그 긴 여행길에 오를 것이다. 게슴츠레 눈뜬 창들이 바라보던 광장에서 만난 소년의 얼굴은 그림자도, 공포도 없이 그저 희망과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으니까.

20세기 역사가 거세하고 싶어할만한 차우세스크. 극악했던 독재자가 희망을 앗아가고 체념만 남겨놓았던 21년 전, 족히 30km는 가야 여인숙 하나 있을까 말까 한 시골에서 '유럽 문화수도가 되어 과거 루마니아의 영광을 되찾겠다'고 꿈꾸던 라두 스탕카 극단 배우가 축제를 시작했다. 예술이 고사된 것은 당연하고 피폐한 삶을 이어가기도 고단한 루마니아 촌구석에서 말이다. 그런데 손님을 초대하면 호주머니에 마늘을 넣고 왔다던 이 도시에서 꼭 14년만에 그는 꿈을 이뤘다. '2007년 유럽 문화수도 시비우' 그리고 지금 하루 정도면 구석구석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자그마한 이 도시에는 힐튼, 이비스, 머큐리 등 다국적 호텔체인과 국제공항이 들어서있다.

축제 20주년을 맞았던 작년 그는 또 하나의 기념비적인 성과를 건져 올렸다. 시 예산의 20%를 문화에 배정하게 만든 것이다. 연극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시비우는 몰라도 영화보다 더 생생하게 지옥을 겪게 해주는 작품으로 주저 없이 라두 스탕카의 를 꼽을 것이다. 악몽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은 나 혼자만은 아니었을 테니.

라두 스탕카가 없었다면 그가 과연 꿈을 꿀 수 있었을까? 어른들의 체념을 운명으로 수긍해 버렸다면 시비우가 유럽문화수도로 지정될 수 있었을까?

스페인 저가 브랜드 '자라'를 명품이라 소개하는 크리스티나는 여느 유럽소녀들과 다를 것 없이 명랑하게 웃었다. 그녀에게 "차우세스크를 아냐"고 물었던 나는 잘난 체 하려고 어려운 단어를 입에 올리는 '밥맛 없는 꼰대'였을 게다. 그렇게 루마니아의 오늘은 그림자를 뒤로 감춘 부모가 차우세스크 시대를 기억에서 지워낸 자식을 통해 미래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소녀는 저녁에 있을 가장무도회에 입고 갈 의상을 제일먼저 고르기 위해 열일 제치고 달려갔다.

김신아 아트 프로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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