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전은 시대의 이단아였다. 그는 개혁을 꿈꾸다가 혁명의 길을 택했다. 처음부터 역성(易姓)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시대 상황이 왕조의 변경이라는 혁명의 길을 택하게 하였다. 고려말 원명 교체기의 대외적인 안보적 국익과 대내적인 기득권을 둘러싼 갈등은 별개가 아니었다. 개혁세력과 수구세력의 명운을 건 한판 승부였다. 그 당시에도 '밖의 정치'와 '안의 정치'는 분리되는 것이 아니었다. 정도전은 원나라에 빌붙어 기득권을 유지해 온 권문세가와 귀족들의 상층 엘리트의 교체만으로는 고려의 고질화하고 구조화된 총제적 비정상을 바로 잡지 못할 것이라고 봤다. 고려의 병은 너무 깊었다. 이는 전제개혁을 통한 부패한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혁파와 정통성의 기반인 혈통의 교체로 나타났다. 그래서 역사는 정도전과 이성계의 국가개조사업을 개혁이라고 부르지 않고 혁명이라고 기술한다. 그렇다면 당시 이색, 정몽주, 최영 등 비록 기득권 세력이지만, 개혁에 혼신을 다했던 인물들과 함께 고려의 틀 안에서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수는 없었던 것인가. 명문대가 집안 출신이 아닌 비판적 반골 기질 정도전의 사회와 체제에 대한 불만이 체제 전복의 동인을 제공한 것인가. 본질적인 문제는 권문세족들의 정치권력 및 경제권력의 독점과 자영농의 몰락이다. 사회경제적 양극화의 심화를 치유할 만한 개혁의 부재는 결국 혁명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도전이 이 시대에 주는 함의를 곱씹어 보면 우리가 처한 역설적 상황, 희망과 좌절이 공존하는 시대적 고민에 대한 해법의 단초라도 얻을지 모른다. 대륙과 해양의 길목에 위치하고 강대국 중국과 러시아, 일본과 인접하고 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사대와 교린을 생존의 철학으로 삼게 만들었다. 한 미 일과 북 중 러의 신냉전의 기류가 형성되고 있는 동북아 정세는 구한말의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각축과 너무도 흡사하다. 역사인식에 기반을 둔 통찰과 국가 전략적 사고가 절실한 이유이다.
'안과 밖'의 정치를 보면 내치와 외치의 엇박자의 정도는 심해지고 있다. 1인당 국민소득이 2만6,000달러라고는 하지만, 가계가 실질적으로 벌어들이는 소득을 보면 턱없는 얘기다. 비정규직의 문제, 사회적 양극화의 정도는 날로 심해지고 있다. 경제민주화와 복지가 지난 대선 때 정치인들의 일상적 구호였으나 이제는 그저 낯익은 정치적 수사(修辭)로 감동 없이 다가온다. 권력기관들의 후안무치는 일상이 됐다. 젊은이들은 부와 권력의 세습화와 계층 블록의 공고화라는 사회경제적 환경 속에서 신분의 수직적 상승이라는 희망이 점점 엷어져 감을 인식한다.'사다리'의 퇴장인가. 구조적인 문제들이다. 정권이, 관료가 사각지대 국민의 삶에 다가가고 여야가 민생에 더 천착하면 상황은 좋아질 것이다. 그러나 민생 현장에 파고들고 여야가 '적대적 공생'을 넘어 '새정치'를 실천해 나가며 '87체제'를 넘는 새로운 권력구조의 변경이 성사되면 구조적 문제들은 해결되는 것인가.
경제 사회적 양극화가 자본주의의 속성이기도 하고, 좀처럼 수그러들 줄 모르는 신자유주의의 산물이기 때문에 비단 우리만의 고민은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은 통찰의 부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경제 사회적 격차가 벌어져 있으나 기회가 균질적으로 보장되어 패자부활이 가능한 사회와 계층 및 거주 지역의 블록화, 신분의 수직적 상승 기회의 협애함이 깊어가는 사회를 동일 선상에 두고 볼 수는 없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대로, 중장년과 노년은 또 그들대로 느끼는 미래의 불안은 그렇지 않은 동 연령대의 '살기 좋은 대한민국'이라는 인식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 차라리 정권의 문제라면 해결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질적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실질적 민주주의는 사회경제적 삶의 균질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밖의 정치'가 '안의 정치'와 조화롭게 조우할 때 외치와 내치는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더 이상 사회경제적 모순의 구조화가 심화하여선 안된다. 정도전이 좌절하고 고민했던 시대 상황이 재연되게 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 정치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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