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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의 힘

입력
2014.03.28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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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시절, 독일의 하노버에서 특별한 국제 콩쿠르가 열렸다. 아무나 참가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 즈음 2년간 국제 콩쿠르를 우승한 연주자에게만 초청장을 보내 참가자격을 엄격히 제한했다. 물론 상금과 연주기회는 월등하고도 알찼다. 하노버시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당시 엑스포 개최를 기념해 열린 가장 성대한 행사였던 덕택이다. 보통의 경연이라면 서류나 테이프 심사로 참가자들을 추려내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콩쿠르는 출발부터 달랐다. 이미 우승으로 혹독히 검증 받은 젊은 연주자들이 하노버에 몰려들었다. 학교의 콘서트홀에서 예선과 준결선이 진행되었다. 창과 방패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연주자들의 치열한 사투는 객석마저 후끈한 전장으로 바꿔 놓았다.

준결선이 진행되던 날이었다. 콩쿠르의 열기는 더더욱 격렬해졌고 무대 위에선 우크라이나 청년이 라흐마니노프 소나타 2번을 심취해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객석에서 시끄러운 소란이 일어났다. 청중 한 명이 바닥에 쓰러지며 발작을 일으켰던 것. 정신을 잃은 할머니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 들었고, 콘서트홀 안에 구급대의 들것이 들어왔다. 심사위원을 비롯한 공간 안 모든 사람들이 당황해 하며 동요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자신의 세계에 심취해 평정을 잃지 않은 사람이 있었다. 무대 위에서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던 우크라이나 청년.

처음엔 연주를 중단하면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괜히 고집을 피우는지 알았었다. 헌데 심사위원들이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그의 연주는 도통 멈출 줄 몰랐다. 나는 음악을 대하는 그의 집중과 몰입이 내가 체험하지 못한 전혀 다른 차원의 수준이라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청년은 마지막 마디의 쉼표까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연주했다. 청중은 즉각적으로 환호하지 않았다. 외려 한동안 숙연했다. 이튿날 신문(HAZ)은 이 장면을 '집중과 몰입'에 관한 한 최고의 '예술적 경험'이었다며 다른 참가자들의 통상적인 연주 평과는 달리 기록했다. 허나 오케스트라와 협연해야 할 결선에선 저 몰입과 심취가 그대로 약점이 되리라는 것도 우려했다.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을 연주했던 그의 최종결선 무대는 신문의 우려대로 음악적 '고립'을 목도하지 않을 수 없던 안타까운 무대였다.

콩쿠르가 끝난 며칠 후 그때 그 학교 콘서트홀에서 플루트를 전공하던 일본 친구의 리사이틀을 반주했었다. 대기실 거울 앞에 서있자니 플루티스트가 막무가내 얼굴로 돌진해 왔다. 홑꺼풀 작은 눈에 콤플렉스를 느끼던 친구는 일본에서 특별히 공수해왔다는 인조 속눈썹에 한참 매료되어 있었다. '네 눈도 정말 작잖아'란 친구의 사탕발림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 속눈썹을 얼기설기 붙인 채 무대에 입장하니 육중한 이물감과 함께 악보를 향한 시선에 차양과 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한편, 연주가 무르익어 가는 동안 플루티스트의 몸짓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했다. 눈을 한껏 감은 채 자꾸만 몸을 돌려 객석 반대편으로 향하는 것이었다. 모케(Mouquet) 소나타의 마지막 마디를 끝내었을 때, 그녀의 몸은 영 엉뚱한 곳을 향하고 있었다. 화들짝 놀라 몸을 돌리는 그녀에게서 반쯤 떨어져 대롱대롱 거리는 속눈썹을 보았다. 눈을 감지 않을 수 없었던 처지가 단박에 이해되었다. 나는 며칠 전 우크라이나 청년의 강철같은 집중을 들려주며 그녀를 위로했다. '이야, 너도 그 몰입이 되는구나. 부러워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잊고 무아지경에 빠져드는 연주자들을 늘 선망해온 터였다. 그 집중과 몰입이 주는 에너지는 객석에 앉아있어도 맨 살에 솜털이 삐죽 곤두설 만치 강렬했다. 독주회를 준비하자니 여러 한탄이 마음속을 맴돈다. 왜 스스로 심취하지 않는가. 왜 바깥 상황에 일희일비하는가. 정신의 근력은 왜 이토록 허약한가. 유학시절 학교 콘서트홀에서 일어난 인상적인 장면을 떠올리며 마음새를 다독이는 중이다. 단, 스스로 몰입하더라도 길을 잃지 않고 싶다.

조은아 피아니스트ㆍ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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