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라드의 제왕들이 속속 새 앨범을 내고 활동을 재개하고 있다. 음반 산업이 최고의 활황을 누리던 1980~1990년대 가요계를 주름 잡던 정상급 가수들이다. 25, 26일 이틀 사이 이선희(50), 이승환(49), 조성모(37)가 일제히 새 앨범을 발표했다. 앨범을 냈다 하면 수십 만장은 예사롭게 팔아 치우며 천하를 호령하던 톱스타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들은 가요 차트에서 보기 힘든 '왕년'의 스타가 됐다. 아이돌 춘추전국시대에 결연히 출사표를 던진 그들을 만났다.
데뷔 30주년 맞은 이선희
'J에게'로 1984년 강변가요제 대상을 받으며 데뷔해 올해로 가수 생활 30주년을 맞은 이선희는 "30년 내내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성공을 버릴 줄 알고 다른 모습을 위해 두려워하지 않고 노력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다"고 했다. 젊은 세대에겐 가수 이승기를 발굴한 '스승'으로 더 유명한 그가 열다섯번째 앨범 '세렌디피티'를 25일 내놓았다. 14집 '사랑아' 이후 5년 만이다. 인디계의 실력파 음악인들인 고찬용, 선우정아, 에피톤 프로젝트와 요즘 잘 나가는 작곡가인 이단옆차기와 박근태가 참여해 '젊은 감각'을 더했다. 11곡 중 9곡을 작곡한 이선희는 "항상 내 옆에 있었지만 가까이 있다는 걸 잊고 살았던 것을 앨범에 담고 싶었다"면서 "노래만 불러가며 그저 그렇게 지내는 가수가 아니라 실패한다 해도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발전해 나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새 앨범에서 이선희는 터트리기보다는 머금고, 과시하기보다는 숨긴다. 록, 보사노바, 댄스, 국악 등과 접목을 시도하긴 하지만 파격에 이르지는 않는다. 이선희의 목소리만 아니면 흘려 들을 만큼 평이한 곡도 더러 있다. 그는 "예전부터 실험을 계속해 왔는데 성공한 적도, 실패한 적도 있었다"며 "그래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르는 발라드이고 샤우트 창법이 보여주는 힘보다는 우리말과 음색이 주는 힘을 담은 곡이라면 장르에 상관 없이 노래할 것"이라고 했다. 그는 내달 18, 19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을 시작으로 전국 주요 도시를 도는 데뷔 30주년 기념 콘서트 투어를 한다.
'비상을 위한 추락' 이승환
유쾌한 '마조히스트' 이승환은 4년 만에 11집 '폴 투 플라이'를 발표했다. '비상을 위한 추락'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에 전작의 처참한 실패를 만회하고자 하는 결기가 담겨 있다. 그는 최근 만난 자리에서 "지난 앨범이 역사의 뒤안길로 쓸쓸하게 사라져서 벼랑 끝에 선 느낌이 들며 더 이상 앨범을 내고 싶지 않았는데 2년쯤 지나니 좀이 쑤시더라"라며 "그 느낌을 더 느끼고 싶지 않아 순수 녹음비만 3억8,000만원을 쓰는 등 앨범의 완성도를 높이고 마케팅도 열심히 하고 있다"고 했다. 발라드와 미드 템포 위주로 담긴 앨범 제목에는 '전(前)'이라 썼다. 록의 비중이 높아질 후편은 "전편이 성공해야 낼 수 있다"고 엄살을 부렸다.
영화 '밤의 여왕'에 투자했다가 막심한 손해를 본 뒤 "송충이는 솔잎만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음반 제작에 더 공을 들였다. "사실 저는 1997년부터 내리막길을 걸었어요. 10집의 실패가 가장 컸죠. 발매 후 하루 만에 음원 차트에서 사라졌더군요. 심각하다는 걸 느꼈죠. 막막했어요. 이번엔 대중친화적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가사가 잘 들리고 감정이 잘 보이는 데 신경을 썼어요. 가창력에 자신이 없었는데 그걸 불식시키고 싶기도 했어요."
10곡이 담긴 새 앨범에서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기리는 노래가 눈에 띈다. 국회의원인 도종환 시인이 가사를 쓴 '함께 있는 우리를 보고 싶다'에 대해 그는 "딱히 그분을 위해 쓴 건 아닌데 노래하면서 계속 그분이 생각이 났다. 도종환 시인에게 그분을 위해 불렀으면 하는데 어떻겠냐고 여쭸더니 '부르는 사람의 몫'이라는 답이 돌아왔다"고 했다. 이승환의 새 노래는 28, 29일 서울 올림픽공원 우리금융아트홀을 시작으로 4월 5일 수원 경기도문화의전당, 4월 12일 성남아트센터 등으로 이어지는 콘서트에서 직접 들을 수 있다.
돌아온 발라드의 황태자, 조성모
조성모는 발라드 계보도에서 음반판매량 기준으로 정점을 찍은 가수다. 2000년 '가시나무'와 '아시나요'의 히트로 한 해에만 500만장의 음반 판매고를 기록한 신화적인 가수였지만 2000년대 후반 극심한 슬럼프에 빠졌다. 3년여 전 발표한 미니앨범(EP)도 그다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했다. 모처럼 새 앨범을 낸 그는 "뒤쳐지지 말자가 모토였다"고 했다. 앨범 제목이 변화의 바람이라는 뜻의 '윈드 오브 체인지'인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제 신인도 아니고 중견, 때로는 원로라는 말도 듣습니다. 이번 음반은 조금 편안하고 초연한 마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업으로 삼은 일, 숙명이라고 생각하며 앨범을 만들었는데 그게 변화인 것 같아요."
새 앨범엔 짧은 인트로를 제외하면 총 여섯 곡이 실렸다. 댄스 가수 현진영이 프로듀서로 나서는 한편 발라드 곡 '첫사랑' '너무 아프다고'를 작곡한 점이 이채롭다. 방송 출연을 통해 음악 이야기로 친분을 쌓았다는 그는 "2년 전 '유나야'를 받아 놓고 두려움에 앨범 작업을 못하고 있을 때 현진영씨가 마음을 잡도록 용기를 줬다"며 "그분이 설렁설렁 일할 것 같지만 노래할 때마다 아사 직전까지 갈 정도로 힘들게 작업했다"고 말했다.
조성모는 "예전엔 시스템 안에서 만들어진 느낌이 들었지만 이젠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를 담았다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마지막 앨범이라도 되는 것처럼 많은 노력을 기울여서인지 세간의 평가에 대해서도 걱정하는 눈치였다. "예전엔 노래에 힘이 많이 들어갔던 것 같은데 나이가 들고 나니 조금 자연스러워져요. 성공에 대한 압박이 심해서 도망가고 싶은 적도 있었죠. '살아있네'라는 말을 들었으면 해요. '산으로 갔네' '발성이 왜 이래' 같은 말만 제발 안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하하."
고경석기자 kav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