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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보기] <6>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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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보기] <6>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입력
2014.03.27 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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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하이텔 시절에 왕가위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에 관한 이야기를 어떤 게시판에 올린 적이 있다. 벌써 20여 년 전의 일이고, 게시판에서 바로 쓴 글이라서 그 파일도 내게 남아 있지 않은데, 그것을 갈무리해 둔 사람이 있었고, 최근에 인터넷에서 그 글을 찾아낸 사람이 있었다. 다시 읽어보니 내 글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몇 구절을 지우고 고쳐서 다시 써본다.

영화에서 두 타이틀롤 가운데 하나인 서독(장국영)은 무기질의 남자라고 부를 만하다. 무예로 말하면 당대 제일급의 고수인데, 자신의 처지와 일에 명철하고, 감정에 흔들리는 법이 없고, 겉모습 그럴듯한 것들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며, 불확실한 것들에 결코 기대를 걸지 않으며, 고통에 의연하고, 세속적 가치에 초연하다. 몸과 마음이 모두 강철 같은 이 남자가 사막에 자기 자신을 가두고 있다. 그의 직업은 해결사다. 누군가를 죽여야 할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무공은 뛰어나지만 불운한 검객'을 소개해 주는 일이다. 그는 이 일에 어떤 시답잖은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다. 바람이나 파도가 '가치중립적으로' 자기들의 일을 하듯이 그도 역시 무심하게 자기 일을 할 뿐이다. 그 일이 파도의 역할과 다른 것이 있다면, 그것이 늘 피비린내를 몰아온다는 것과 돈으로 보상을 받게 된다는 것 정도다. 그가 방랑검객 홍칠(장학우)에게 일을 시킬 때, '대의에도 맞고 돈도 벌리는 일'이라는 표현을 쓰지만, 이때도 대의를 정말 중요하게 여겨서는 아닐 것이다. 그런 것이 아직 세상 물정을 모르는, 따라서 '신발이 없는' 홍칠을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뿐이다. 그는 세속에 초연하나, 세태염량은 빠르다. 홍칠에게 신을 신겨야 고객들에게 돈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중요한 것은 늘 돈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막에 은거해 있는 그가 돈의 가치를 진정으로 신봉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에게서 돈이란 하나의 핑계, 다른 의도나 목적이 끼어들 수 없게 하는 구실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서, '돈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말은 '다른 어떤 것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 되겠다.

서독이 아무 것에도 봉사하지 않는 이유를 영화는 충분히 설명한다. 가장 중요한 것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옛날 고향 백태산을 떠나기 전 여자 하나(장만옥)를 알았는데, 그 여자가 그의 형과 결혼해버리고 말았다. 그가 처음 방랑검객으로 강호에 나설 때, 사랑한다고도, 함께 가자고도 하지 않은 채 홀로 버려두고 떠난 것에 여자가 원한을 품었던 것이다.

장만옥은 이제까지 백태산과 사막을 왕래하던 동사(양가위)의 손에 술 한 병을 들려 서독에게 보낸다. 그러나 마시면 모든 것을 잊게 된다는 이 술 '취생몽사'를 서독은 마시지 않고 오히려 동사가 마시고 만다. 동사가 잊고 싶었던 것은 '잃어버린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의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 한 사람의 무사인 친구(양조위)의 아내 도화(유가령)와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양조위에게도 '취생몽사'를 나누어 마시자고 하나 사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양조위는 '몸을 차갑게 해주는' 물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그는 동사처럼 현실과 자신을 함께 속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술병을 보내고 얼마 후 장만옥은 서독에게 편지 한 장을 써놓고 죽는다. 두 해나 지나서 도착한 이 편지에서 장만옥은 '가질 수는 없어도 잊지는 말아야 한다'고 쓰고 있었다. 이 말은 거의 영화 전체의 주제가 된다. 쿤데라의 '생은 다른 곳에'라는 말이 랭보의 '진정한 삶은 여기 없다'는 말에 대한 번안이라면, 장만옥의 이 말은 쿤데라의 그것을 동양식으로 탁월하게 다시 번안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가질 수 없는 것은 여기 없는 것이며, 잊지 않은 것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일 테니까.

서독은 아무것도 잊어버리지 않는다. 이 점에서 그의 태도는 동사의 태도와 분명하게 상반된다. 동사는 친구의 아내와 관계를 가질 때도, 누구에게 장난으로 결혼 약속을 할 때도 진정한 것의 대용품으로 만족하는 태도를 보인다. 아마 이 영화의 배경이었을 김용의 '영웅문'에 의하면, 동사는 나중에 한 섬을 기화요초로 꾸미고 거기에 '도화도'라는 이름을 붙여 가공의 무릉도원, 가짜 낙원을 이 세상에 만들기까지 한다. 반면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이 서독의 일이다.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모든 감정과 느낌들, 잃어버린 것을 닮았으나 그것은 아닌 모든 것들을 또한 제거한다. 세상은 사막이 되고 그의 마음도 당연히 사막이 된다. 그 '잃어버린 것'에 대한 기억만을, 습기를 완전히 제거한 형식으로, 절대적이고 순결한 형식으로 남기기 위해서이겠다. 그는 서쪽으로, 더 깊은 사막으로 간다.

물론 '동사서독'에는 이 고행의 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눈 멀어가는 검객' 양조위의 경우가 있겠다. 그는 눈이 완전히 멀기 전에, 세상을 완전히 잃기 전에, 고향의 복숭아꽃을, 실은 아내 도화를, 다시 보러 갈 여비를 벌기 위해 마적 떼와 대결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마적이 오는 날은 정해져 있지 않으나 복숭아꽃이 피는 시기는 정해져' 있다. 눈은 멀어 가는데 복사꽃 피는 계절이 확실하다는 것, 그것은 이 세상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될 자에게만은 적어도 저 잃어버린 것, 진정한 것이 이 세상에 있다는 말이 되겠다. 그는 끝내 마적의 칼에 맞아 죽는다. '칼이 빠르면 피 솟는 소리가 아름답다'(이 대사는 일본의 어느 사무라이 영화에서도 들었던 기억이 있다)고 했는데, 그는 자기 피가 그렇게 아름답게 솟는 소리를 듣는다. 죽음과 삶을 맞바꿀 때만 삶은 진정한 것이 된다고 안타까운 해석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홍칠의 경우는 확실히 감동적이다. 아직 순박한 그는 서독의 하수인이 되어 마적 떼를 무찔렀으나, 서독처럼 사막이 되는 것이 싫어, 어느 순진가련형 시골처녀(양채니)의 달걀 하나를 먹는 대가로 목숨을 걸기도 한다. 그리고 아내와 더불어, 다시 말해 세상 속의 삶과 더불어, 바람을 맞받아, 북쪽으로 가기를 결심한다. 잃어버린 것이 정말로 진정한 것이라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발견할 수도 건설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믿어야 하겠다. 운 좋게도 순진성을 상실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모용연(임청하)을 빼놓을 수 없다. 모용 부족의 공주로 낮에는 오빠 모용연이 되고 밤이면 누이동생 모용언이 되는 이 다중인격자는 서독에게 청을 드려, 이 세상에서 자신이 받았던 모욕을 없애거나 두 인격 중에 하나를 없애고 싶어 한다. 그러나 결국 이 이상한 쌍둥이는 물속의 자기를 들여다보며 칼로 그 물을 가르는 검법을 익히고, 독구패라는 이름으로 무예의 일가를 이루게 된다. 홀로 자신을 구하기도 하고 패배하기도 한다는 말일까. 아무튼 그녀는 나르시스트이며, 잃어버린 모든 것을 저 자신의 안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끌어안고 산다. 그 삶이 비록 진정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혼자 사는 삶이기에 처연하다.

대강 이런 이야기였는데, 지난해에 개봉된 왕가위 감독의 또 다른 무협영화 '일대종사'를 보면서 저 시간에 쫓기는 눈먼 무사에 관해서 좀 더 길게 쓰지 못했던 것이 아쉬웠다. 이 영화가 1997년의 홍콩 반환을 3년 남겨 놓은 1994년에 제작되었다는 것도, 그 영어 제명이 'Ashes Of Time', 즉 '시간의 재'였다는 점도 언급했어야 했다.

'일대종사'는 중국의 무술을 종합하여 영춘권을 만들고 전 세계에 보급하였다는 엽문(양조위)의 일대기이지만, 또한 시간에 대한 철학적 우화이기도 하다. 그는 젊은 날을 행복하게 살았으나 전란과 가난에 몰려 가족과 이별한다. 그는 아내(송혜교)의 손바닥에 "낭군의 마음엔 한 쌍의 다리가 있어, 강과 바다가 앞에 놓였어도 반드시 돌아온다"고 써주었지만, 그는 끝내 아내를 만나지 못한다. 그는 무술인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을 굳세게 내디뎠지만 그 걸음이 아내에게 이르지는 못했다. 시간은 모든 발걸음을 재로 만들었다. 그렇다고 어찌 굳세게 걷지 않겠는가.

또 한 사람의 여자가 있다. 궁이(장쯔이)는 동북의 무술을 종합하여 팔괘장을 만들어낸 궁보삼의 딸로 아버지에게서 궁가 64수를 전수받았다. 엽문은 그녀와의 대결에서 형식상 패배하였지만, 그 64수의 진수를 엿보았고, 여자도 남자도 서로를 마음에 품었다. 엽문은 64수의 시연을 다시 보고 싶어 했지만, 궁이는 끝내 그 소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64수가 남자의 마음을 붙잡아 둘 수 있는 유일한 끈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벌써 몸이 많이 상한 궁이는 궁보삼이 남긴 교훈을 엽문 앞에서 읊는다. "마음에 두고 잊지 않으면 분명히 좋은 결과가 올 것이며, 등불이 있으면 사람이 있다." 무술인으로서 엽문은 내내 세상에 등불을 켰지만, 두 사람은 평생 동안 그 등불 아래로 들어갈 수 없었다. 시간은 등불을 재로 만들었다. 그러나 어찌 등불을 켜지 않을 수 있겠는가. 미처 가지 못한 발걸음과 다 켜지 못한 등불을 그 재 속에 묻어둔다고 해야 하지 않겠는가.

시인 진이정은 1993년 서른네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94)는 그의 유고 시집이다. 그는 눈앞에 다가온 자신의 죽음을 내다보며, 저 눈먼 무사만큼 절박한 처지에서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시를 썼다. 시간이 흘러가며 잠시 만들어 놓았던 것에 그는 끊임없이 이름을 붙인다. 그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시간이 그 모든 이름을 휩쓸어 갈 것이다. 그러나 어찌 이름을 붙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름은 벌써 시인 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 속에 명멸하는 모든 것들을 그 이름으로 한 순간이라도 붙잡아 두려는 모든 열정을 위한 것이다. '일대종사'에서는 말한다. 무술에는 세 단계, 자기를 보는 단계, 천지를 보는 단계, 중생을 보는 단계가 있다고 한다. 저를 본다는 것은 저 자신을 안다는 것이고, 천지를 본다는 것은 저 자신이 미약하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고, 중생을 본다는 것은 인간들의 열정을 생각한다는 것이겠다. 한 인간의 열정은 시간 속에 재가 되어도, 저 열정들은 천지에 가득하다.

흐르는 지금 이 시간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꽃이라고 별이라고 그대라고 명명해도 좋을까요 그대가 흘러갑니다 꽃이 흘러갑니다 흘러흘러 별이 떠내려갑니다 모두가 그대의 향기 질질 흘리며 흘러갑니다 그대는 날 어디론가 막다른 곳까지 몰고 가는 듯합니다 난 그대 안에서 그대로 불타오릅니다 그대에 파묻혀 나는, 그대가 타오르기에 불붙어 버렸습니다 지금 흘러가는 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누구의 허락도 없이 잎이라고 눈이라고 당신이라고 명명해 봅니다 당신에 흠뻑 젖은 내가 어찌 온전하겠습니까 아아 당신은 나라는 이름의 불쏘시개로 인해 더욱 세차게 불타오릅니다 오 지금 흐르고 있는 이 꽃 별 그대 잎 눈 풀씨 하나 그러나 나도 세간 사람들처럼 당신을 시간이라 불러봅니다 꽃이 별이 아니 시간이 흐릅니다 나도 저만치 휩싸여 어디론가 떠내려갑니다 아아 무량겁 후에 단지 한 줄기 미소로밖엔 기억되지 않은 그대와 나의 시간, 난 찰나를 저축해 영겁을 모은 적이 없건만 이 어이된 일입니까 미소여 미소여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솜털 연기 나비라고 명명해 봅니다 엉터리 작명가라 욕하지 마셔요 당신이 흐르기에 나는 이름 지을 따름입니다 흐르는 당신 속에서 난 이름 짓는 재주밖엔 없습니다 때문에 난 이름의 노예, 아직도 난 이름의 거죽을 핥고 사는 한 마리 하루살이에 지날지 모릅니다 아아 당신은 흐릅니다 난 대책없이 당신에게로 퐁 뛰어듭니다 당신은 흐름, 난 이름, 당신은 움직임 아주 아주 미세한 움직임, 나는 고여 있음 아주 아주 미련한 고여 있음, 멀고 먼 장강의 흐름 속에서 무수히 반짝이는 의 파도들이여 거품 같은 이름도 흐르고 흐를지면 언젠간 당신에게로 다가 갈 좋은 날 있을 것인가요 그런가요 움직임이시여 어머니 움직임이시여 고여 있는 의 슬픈 반짝임, 받아 주소서 받아주소서

고려대 명예교수ㆍ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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