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현
대구경북과학기술원 융복합대학 교수
1990년대의 어느 날. 나는 20년 이상 사용해온 주민등록번호가 잘못 발급되었으니 한 자리가 수정된 새 번호를 사용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동사무소를 가보니 주민등록등본을 떼어주면서 변경이 필요한 곳에 제출하라고 했다. 그 후 거의 5년간 난 등본을 항상 들고 다니면서 내 주민번호를 필요로 하는 모든 곳에 제출하여 일일이 수정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주민등록번호 재발급이 얼마나 많은 사회경제적 비용을 초래할지 익히 잘 아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나는 주민등록번호의 전면 재발급만이 우리나라를 재앙에서 구할 유일한 길임을 믿게 되었다. 그 이유는 작금의 개인정보 유출사태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며, 이제 주민등록번호의 전면 재발급과 사용 최소화만이 상처받은 대한민국의 사회경제시스템을 구원할 유일한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한 매체의 보도에 따르면, 중국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바이두’라는 포털사이트에서 한국인의 이름 성별 주민등록번호 등을 수백 건 이상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그 뿐인가. 심지어 한국인의 신분증 정보만 따로 모아 검색할 수 있는 검색엔진까지 있다고 하니 우리네 개인정보는 자유롭게 유통되는 공개정보의 처지로 추락했다고 보아도 무리가 없다. 소수가 개인정보를 팔고 사는데 그치지 않고 이제 공개검색이 가능해졌으니 더 이상 나빠질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솜방망이 처벌이 촉진제 역할을 해 왔다. 지난 2011년 한 포털사이트에서 가입자 3,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의 개인정보가 유출된 사건이 일어났을 때, 난 사태의 심각성으로 보아 그 웹사이트를 운영하는 업체는 최소한 파산내지 강제폐업 당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모든 유출 피해자에게 즉각적인 보상이 이뤄지리라 기대했으나, 일부 이용자들의 소송이 진행 중일 뿐 아직도 보상에 관해서는 감감무소식이다. 같은 해 있었던 농협의 전산망 사태 역시 북한의 소행으로 추정된다는 정부 발표 이후에 과연 이용자가 마음 놓고 이용해도 되는 건지 불안하기만 했다.
아니나 다를까. 왜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현실이 되는지. 올 초 있었던 농협을 비롯한 3개 카드의 신용정보 유출사건은 이전 사건들을 압도하는 엽기적인 사태였다. 이름 전화번호 주민등록번호 뿐만 아니라 연소득 직장 주거상황 타사카드 보유상황까지 거의 개인의 ‘아바타’를 만들 수 있을 수준의 총체적 정보유출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금융기관들은 2차 유출은 없다고 강변했지만, 그마저도 최근 관련 기관들이 2차 유출을 알고도 쉬쉬해온 것이 밝혀졌다.
이제 선택의 여지는 없다. 자동차 앞유리 한 켠에 붙여놓은 핸드폰 번호를 이용해서 스팸을 보내는 나라. 금융기관이건 포털사이트건 정보만 모았다 하면 질질 흘리고 새는 나라. 정부가 고심 끝에 내놓았다는 ‘금융분야 개인정보 유출 재발방지 종합대책’에 조차 집단소송제나 개인정보 유출시 즉각 보상 같은 내용은 들어있지도 않은 나라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제 우리의 ‘출구전략’은 하나뿐이다. 주민번호 전면 재발급. 일단 재발급 작업이 끝나면, 어떤 경우에도 개인의 주민등록번호 전체 대신 일부만 요구할 수 있도록 하고 그것도 비밀암호화 소프트웨어가 설치된 전용기기를 누르는 형태로만 입력토록 해야 한다. 어떤 신분증에도 개인의 정보 전체를 담도록 해서는 안 된다. 남의 운전면허증 한 장과 신용카드 한 장이 든 지갑을 습득했을 때 어떤 범죄든 저지를 수 있는 현재의 시스템은 분명히 뭔가 잘못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남의 개인정보를 요구할 때 최소한의 정보만을 요청하고, 일정 기간 뒤에는 복원 불가능할 정도로 깔끔히 폐기하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인터넷상에서 마구 돌아다니는 나의 정보를 발견할 때의 그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정부가 바로 ‘국민행복’ 정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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