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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위기] <상> 크림사태 '수상한 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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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위기] <상> 크림사태 '수상한 발단'

입력
2014.03.2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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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유럽 티모셴코 前총리 이어 친러 야누코비치 대통령까지부정축재 일삼으며 민심 잃어"빌어먹을 EU" 도청사건 등 영향력 행사하려던 美에 비해EU는 소극 대응으로만 일관양측 모두 사살한 저격수 說… 극우 폭력세력 정체도 의심

지난해 11월 반정부 시위로 촉발된 우크라이나 사태는 눈깜짝할 사이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이라는 국제적인 사건으로 발전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실각과 새 정부 구성에 이어 러시아의 군사개입과 크림 합병 완료까지 걸린 시간은 딱 한 달. 동서 신냉전 우려까지 나온 이번 사태를 되짚어 우크라이나 위기는 과연 누가 부른 것인지, 승자는 누구이고 패자는 누구인지, 한반도에는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 짚어보는 기획기사를 세 차례 연재한다.

러시아의 크림반도 개입에 가려 별로 주목 받지 못하는 사건이 있다. 시위대와 경찰의 유혈충돌을 막고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지난달 21일 야누코비치와 야당 대표, 유럽연합(EU) 대표까지 참여해 서명한 합의와 그런 정치적 타협을 비웃기라도 하듯 몇 시간 뒤 벌어진 유혈사태다.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야누코비치는 헬기로 키예프를 탈출했고 이후 우크라이나 수도는 시위대와 야당이 주도하는 의회가 장악했다.

왜 정치적 합의까지 하고서도 유혈사태를 막지 못했을까. 유혈은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로 발생한 것일까. 그 이면에서는 어떤 역학이 작용하고 있었을까. 우크라이나 사태의 분기점이 된 이 유혈사태를 전후해 유튜브에 공개된 도청 녹음이 이런 궁금증을 풀 단초를 제공한다.

두 건의 도청 사건

첫 번째 녹음 파일은 지난 1월 25일 빅토리아 뉼런드 미 국무부 유럽차관보와 제프리 파얏트 주우크라이나 미 대사의 전화통화 내용이다. 미국이 도청의 배후로 러시아를 의심한 이 통화에서 뉼런드는 EU가 야누코비치를 강하게 압박하지 않아 유엔에 중재자 파견을 요청했다며 "빌어먹을 EU"라고 욕까지 했다.

이어 그는 야누코비치로부터 총리직을 제안 받은 야르세니 야체뉵 조국당 당수(현 우크라이나 총리)에게 호의를 표시한 반면 부총리직을 제안 받은 비탈리 클리치코 개혁을 위한 우크라이나 민주동맹(UDAR) 대표에 대해선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다"라고, 극우민족주의정당 자유(스보보다)는 "제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의견을 표시한다. 파얏트는 "우크라이나에 새 정부를 세우는 협상이 진행돼야 하지만 러시아가 방해공작을 펼 것"이라고 우려했다. 사태는 미국의 우려보다 훨씬 커졌지만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부터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행사하려 한 정황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보다 눈 여겨 봐야 할 녹음 파일은 지난달 말 키예프를 방문하고 온 우르마스 파엣 에스토니아 외무장관과 캐서린 애슈턴 EU 외교안보 고위대표의 통화다. 파엣 장관은 독립광장에서 총에 맞아 숨진 사람들을 살폈던 현지 의사의 말이라며 "저격수들이 시위대와 진압부대 양측 모두를 사살했으며 동일 인물"이라고 말했다. 파엣은 "저격수들 뒤에 야누코비치가 아니라 야권 인사 누가 있다는 의혹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며 "우크라이나 새 정부가 유혈사태 진상조사를 꺼리는 것도 의혹을 키운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우크라이나 시민사회 대표들 사이에서는 새 정부를 구성한 사람들에 대한 신뢰가 없다"며 "이들에게 더러운 과거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극우 세력의 정체

우크라이나 정부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반정부 시위 시작 이후 지금까지 시위 중 숨진 사람은 약 100명에 이른다. 그런데 유혈충돌이 격화했던 지난달 하순 사망자들은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이 아니라 동시에 저격수의 공격을 받았다고 파엣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야누코비치와 야당 대표, 독일 프랑스 폴란드 외무장관이 참여한 EU 대표, 러시아 대표까지 참가한 합의는 물거품이 됐다. 당초 합의에는 대통령 권한 축소를 위해 2004년 헌법에 바탕한 의원내각제로 정치체제를 바꾸고 열흘 내 거국내각을 구성하며 연내 대선을 실시한다는 정치일정과 경찰, 시위대 모두 폭력을 중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시위대가 들끓자 야누코비치가 러시아로 망명길에 오르자 야당이 주도하는 의회는 준비라도 하고 있었다는 듯 바로 대통령 권한을 축소하는 헌법개정안을 통과시키고 유일 합법 권력임을 자처한 뒤 야누코비치 퇴진과 5월 조기 대선을 선언했다. 우크라이나 새 정부 주장대로 형식으로 합법일지는 모르나 실상은 야누코비치가 말하는 "쿠데타"에 가까운 상황이었다.

현 우크라이나 새 정부 내에는 뉼런드가 참여를 원치 않은 '네오나치' 스보보다(대표 올렉 탸그니복)와 전 WBC 챔피언이 이끄는 UDAR 같은 정당이 포함돼 있다. 이들 중에는 '우크라이나에 영광이 있으라 적에게는 죽음을' '모스크바 놈들을 찔러 죽여 러시아인을 박鉞舅?공산주의자를 교수형에' 같은 구호를 내거는 곳도 있다고 한다. 스보보다 의원들이 최근 푸틴 연설을 방송했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 국영방송국에 난입해 사장을 때리며 사표 쓰라고 강요하는 영상도 인터넷에서 볼 수 있다.

이런 정서를 반영하듯 새 정부 대표들은 23일 우크라이나 민족사회 설립을 선포하며 러시아어 사용자는 우크라이나 민족사회의 정당한 권리를 갖는 일원이라는 지위를 박탈하고 시민권과 정치권리를 차별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야누코비치가 러시아의 군사개입을 간청하며 지난 1일 푸틴에게 보낸 편지도 이런 사정을 알고 읽으면 쫓겨난 독재자의 헛소리로만 들리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의 영향 아래서 테러와 폭력이 횡행한다. 사람들은 언어나 정치적 신조 때문에 처형되고 있다. 평화와 법, 질서, 안정, 우크라이나인들을 지키기 위해 러시아군을 사용해 줄 것을 간청한다.'

친러ㆍ반러 엎치락 뒤치락

우크라이나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러시아와 유럽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살아야 하는 나라다. 러시아뿐 아니라 미국이나 유럽도 이런 우크라이나를 유리하게 이용하려는 계산을 언제나 하고 있다. 1991년 옛소련 해체 후 독립국가연합(CISㆍ이마저 퇴근 탈퇴를 선언했다)으로 묶였으면서도 러시아와 조금씩 거리를 두며 유럽의 원조를 끌어내 경제원조를 받았다. 그렇다고 러시아의 지원을 무시할 수도 없다. 러시아 천연가스관 수송로를 제공하면서 얻는 이득이나 무역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국제정치전문가이자 CNN 진행자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우크라이나 위기가 "두 실수자" 때문에 초래됐다고 말한다. 러시아와 함께 그는 "우크라이나가 서쪽으로 오는 것을 돕고 싶었다면 대담하고 관대하고 부드러운 유혹 전략을 사용"해야 하는데도 "러시아의 공격성을 자극"한 유럽에 책임을 물었다.

우크라이나의 위기는 근본적으로는 친러, 친유럽 가릴 것 없이 우크라이나 정치권 전반이 부패했다는 데서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변변치 않은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전과까지 있는 야누코비치의 호화 사저가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최근 감옥에서 풀려난 친유럽파의 기수 티모셴코 전 총리도 마찬가지다. 휠체어에 앉은 채 반정부 시위의 상징인 독립광장에 나타난 그를 군중은 그다지 환호해서 맞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정치가 이 같은 불신을 씻지 않으면 크림을 뺏긴 뒤에 또 어떤 위기에 휘말릴지 모를 일이다.

박민식기자 bemyself@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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