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집결한다. 백화점과 대형 마트의 가장 좋은 자리에 올라앉은 '상품'을 우러르며 소비자는 살아있음을 만끽한다. 일찍이 발터 벤야민은 이러한 소비왕국의 탄생을 놓고 "이제는 소비가 사람들을 한 무리로 느끼게 만든다"고 말했다. 재화를 계속 생산해야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이 자본주의의 숙명이다. 마치 자본주의의 태엽을 감아주기 위해 사력을 다하듯 이 땅의 소비자들은 밤낮으로 상품 소비에 나서며 소속감과 동지의식을 가진다.
소비가 만인의 취미로 등극한 데에는 소비가 갖는 민주주의적 속성이 적잖이 작용한다. 부자의 돈이나, 빈자의 돈이나 매장의 판매원에겐 다름이 없다. 돈 앞에 신분의 차이도 없거니와 계층간 격차도 느낄 필요가 없다. 어쩌면 근대 민주주의의 성장에 이러한 소비의 민주주의가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일제 자본과 열강의 상품이 물밀듯 들어온 1900년대 초반 한국은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소비왕국의 태동기를 맞고 있었다. 저자는 100여 년 전 이 땅에 등장한 상업 광고들을 통해 한국 자본주의의 시발점을 들여다봤다. 시를 공부하다 광고 연구가로 탈바꿈했던 저자는 '자본주의 시(詩)'라 불리는 광고에 얽혀있는 텍스트로 출세, 교양, 건강, 섹스, 애국 등 당시 한국인이 품었던 다섯 가지 욕망의 키워드들을 분석해냈다.
일제강점기로 근대화가 이뤄지지 않은 시기이지만 20세기 초반 수많은 박래품을 통해 상품소비에 눈을 뜨기 시작한 한국인들은 입신은 더 이상 양반만의 몫이 아니며, 위생은 국가적 과제이고, 여흥은 누구나 원하는 욕구임을 깨달았다. 더불어 모든 가치가 상품으로 소비되는 시대를 맞이하면서 사람들은 '돈만 있으면 누구나 양반행세를 할 수 있는' 세상을 발견한다. 물론 이러한 과정에서 신문과 잡지의 상품광고는 "새로운 가부장으로 등장한 기업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의식주를 공급하고 삶의 윤리와 철학까지 가르쳤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은 소비사회에 대한 이론 분석만으로 채워져 있지 않다. 1920, 30년대 신문 광고와 서적들이 보여주는 당시 소비 트렌드를 들여다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1920년대에는 본격적으로 출판시장에 실용서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새로운 경쟁 사회가 열리면서 두뇌를 개발하고 기능을 습득하는 일이 상품화됐기 때문이다. 당시 신문광고에는 농업 책, 부기 책, 어학 사전, 각종 자격증 교재를 알리는 내용이 많았다. 이러한 트렌드는 놀랍게도 참고서와 자격증도서 시장 외엔 초라하게 축소된 현대 도서시장과 일치한다. 기생요금표를 신문광고에 실었던 기생조합, 성병약이나 포르노 광고가 넘쳐났던 성풍속도는 현대 못지않게 적나라하다.
양홍주기자 yangh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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